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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고 긴 설명서, 초등생도 이해할 수 있게 싹 바꿔야"...WHO '충고'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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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을 거래하다]
<5> 임상시험 강국으로
바시 무어티 WHO 수석과학자
"임상시험 설명서, 더 쉽고 더 간결해야"
"의지만 있으면 가능, 네덜란드가 좋은 예"

편집자주

의약품 효능과 안정성을 검증하는 임상시험이 매년 1,000건 진행된다. 지난해에만 16만 명이 참여했다. 누군가는 더 나은 치료를 위해, 누군가는 경제적 보상을 받으려 임상시험을 선택한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했다는 이유로, 이들을 보호할 제도와 감독은 느슨하고 허술한 실정이다. 한국일보는 4회에 걸쳐 임상시험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해본다.


"임상시험 설명서를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용어가 난해한데, 분량까지 방대합니다." (백진영 한국신장암환우회 대표)

"임상시험 설명서는 제가 봐도 참 어려워요. 참여자 이해도를 높일 방법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정말 자주 해요." (경북의 한 임상시험센터 관계자)

3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회의실에 한국일보가 확보한 임상시험 관련 서류가 펼쳐져 있다. 한국일보가 3개월여간 취재하며 만난 임상시험 참여자들은 임상시험 구두 설명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는 데 반해 설명서는 너무 길고 난해해 임상시험 관련 내용을 이해 또는 숙지하기가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임지훈 인턴기자

3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회의실에 한국일보가 확보한 임상시험 관련 서류가 펼쳐져 있다. 한국일보가 3개월여간 취재하며 만난 임상시험 참여자들은 임상시험 구두 설명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는 데 반해 설명서는 너무 길고 난해해 임상시험 관련 내용을 이해 또는 숙지하기가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임지훈 인턴기자


임상시험은 '참여자 동의'를 전제로 한다. '동의'는 임상시험 정보를 이해한 뒤 이뤄져야 한다. 참여자의 권리는 그래서 '임상시험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환경'에서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임상시험 설명서는 너무 어렵고, 길고,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한국일보가 '건강을 거래하다: 인체시험 사각지대' 취재 과정에서 만난 임상시험 참여자 및 가족, 환자단체 관계자의 공통된 지적이다. 인제대 부산백병원 역시 2019~24년 임상시험심의위원회(IRB)에 제출된 동의서를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한 뒤 지난 9월 대한기관윤리심의기구협의회 연례 학술대회에서 "시간이 지나도 가독성은 높아지지 않았고, 장문 및 전문화 경향으로 참여자 이해를 저해할 위험이 컸다"고 꼬집었다.

의료진의 구두 설명도 충분치 않다. 신동성 가천대 길병원 교수는 "환자를 얼마나 충분하게 이해시킬 것인가는 의료진의 의지에 좌우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임상시험 설명을 위해 시간을 따로 내는 의사가 있지만, 중요한 몇 가지만 설명하고 나머지는 연구간호사에게 맡기는 의사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바시 무어티 세계보건기구(WHO) 수석과학자가 5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진행된 세계보건총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바시 무어티 제공

바시 무어티 세계보건기구(WHO) 수석과학자가 5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진행된 세계보건총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바시 무어티 제공


세계보건기구(WHO)의 바시 무어티 수석과학자는 이에 대해 "참여자 권리 보장을 위해 설명서를 더 쉽고 간결하게 바꾸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한국일보와 최근 전화 인터뷰를 가진 무어티 수석은 '초·중등 학생에게 적합한 수준의 쉬운 용어 및 문장을 사용하는 것' '임상시험 설계 단계에 비(非)의료진 등 참여자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인물을 포함하는 것' 등을 방법으로 제시하면서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한 각국 정부의 의지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무어티 수석은 WHO에서 '모범적인 임상시험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정하는 등 임상시험 관련 프로젝트를 이끄는 핵심 인물이다. WHO에서 백신 개발 팀장 등을 역임했으며, 영국 옥스퍼드대 및 런던대 교수진으로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다음은 일문일답.

-WHO는 '임상시험 설명서가 6~8학년(만 12~14세)에 적합한 수준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WHO는 '설명서가 널리 접근 가능하고, 가독성 측면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법률적 또는 기술적 용어를 피하고, 가능한 한 간결해야 한다'는 내용의 가이드라인을 최근 마련했다.)


"1900년대 중반만 해도 참여자에게 임상시험을 설명하지 않거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시험을 진행하는 비상식적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참여자 동의가 임상시험 전제조건이어야 한다는 인식은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참여자 동의는 정보가 충분히 제공된 상태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제도도 안착했다.

그런데 뜻밖의 부작용이 발생했다. 의뢰자(제약사 등)가 임상시험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각종 문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거나 방어할 목적으로 설명서를 지나치게 방대하게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참여자가 발생 가능한 부작용을 알고도 동의한 것이니 문제가 없지 않느냐'고 주장하기 위해 명분을 쌓은 것이라고 본다. 임상시험 설명서는 길고, 어려워지고, 복잡해졌다. 의뢰자 친화적 설명서를 만들고 이를 참여자에게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빠졌다. WHO는 이런 상황을 바꿔야 한다고 판단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올바른 임상시험 설명서 등을 위한 가이드라인에서 '임상시험 설명서가 6~8학년(만 12~14세)에 적합한 수준이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WHO 홈페이지 및 자료 캡처

세계보건기구(WHO)는 올바른 임상시험 설명서 등을 위한 가이드라인에서 '임상시험 설명서가 6~8학년(만 12~14세)에 적합한 수준이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WHO 홈페이지 및 자료 캡처


-WHO 권고에도 불구, '참여자가 이해하기 쉬운 설명서'를 찾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의뢰자로서는 설명서를 쉽고 이해 가능하도록 제작할 유인이 없다. 문제 해결에 각국 정부가 나서야 하는 이유다. WHO가 '참여자 친화적으로 만들라'고 권유하지만, 큰 틀에서의 권유에 불과하다. 관련 법과 제도가 국가별로 다르고 고려해야 할 사안도 상이하기 때문에 WHO가 세세한 부분까지 규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참여자 친화적 설명서를 구현하고자 노력하는 국가가 없지 않다.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어떤 국가를 예로 들 수 있나.

"네덜란드를 소개하고 싶다. 네덜란드는 임상시험을 계획하는 단계에 참여자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을 포함시키도록 권하고 있다(인간대상연구중앙위원회(CCMO) 주도로 2023년 3월부터 실시). 이 사람은 임상시험 참여자 입장에서 설명서가 이해하기에 용이한지, 너무 복잡하지 않은지 등을 집중적으로 검토한다. 이때 '이 설명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바뀌어야 합니다'라고 의견을 제시한다면, 이에 따라 설명서를 고치는 것이다.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임상시험의 경우 환자 단체와 협력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임상시험 설명서가 어렵게 느껴지는 건 각종 병명, 부작용 등을 전문 용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 있을까.

"인공지능(AI)을 활용하는 것도 효율적일 수 있다. 임상시험 설명서에 포함돼야 할 의학적·기술적 용어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 뒤, 참여자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누군가가 설명서를 검토한다고 가정해보자. 좀 더 쉽고 간결하게 바뀌어야 할 부분이 있을 때 AI에 '중학생 수준 또는 비(非)전문가가 이해할 수 있는 용어 및 표현으로 바꿔 달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감독은 필수일 것이다. 참여자 권리를 증진할 수 있도록 돕는 기술이 있다면 이를 활용하는 방법을 고려해 보면 좋겠다."

한국일보는 임상시험 실시기관(병원 등)에서 확보한 임상시험 설명서를 의학 용어 등이 익숙한 의료진을 비롯한 20명에게 제공한 뒤 읽어보기를 청했다. 이들은 설명서 내용이 너무 어렵고 분량 또한 많아 이해하기가 까다롭다고 입을 모았다. 임상시험 참여자가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 또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래픽=강준구 기자

한국일보는 임상시험 실시기관(병원 등)에서 확보한 임상시험 설명서를 의학 용어 등이 익숙한 의료진을 비롯한 20명에게 제공한 뒤 읽어보기를 청했다. 이들은 설명서 내용이 너무 어렵고 분량 또한 많아 이해하기가 까다롭다고 입을 모았다. 임상시험 참여자가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 또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래픽=강준구 기자


■한국일보 엑설런스랩
팀장: 신은별 기자 취재: 이유진 기자, 백혜진•황은서 인턴기자 인터랙티브: 한규민 디자이너, 윤창원 개발자

목차별로 읽어보세요

  1. ① 프롤로그
    1. • 설명서 단 5분 읽고 임상시험에 동의했다...100만 원에 거래되는 '빈자'의 건강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715150003871)
    2. • "내 건강을 팝니다"…그런데 임상시험 이해는 하셨나요? [인터랙티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0617110002351)
  2. ② 수상한 삼각관계
    1. • 아빠 병원에서 임상시험하고 처방한 그 약, 아들 회사에서 만들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17120004185)
    2. • 병원과 제약사, 임상시험 의약품 서로 몰아줘도...법은 막을 수 없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18040005198)
    3. • 아빠·아들의 수상한 임상시험 생태계…1등 모집회사도 긴밀하게 '우리 편'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20050001752)
    4. • 사례비로 유혹하고 유령 회사 동원하고...'건강 판매' 부추기는 임상시험 모집업체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19250005070)
    5. • "임상시험 모집과 참여 동기가 돈이 되어선 안 된다"...뉴욕의 모집 회사는 다르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19240000996)
    6. • 남자만 가득한 임상시험 병동...이유가 성호르몬 차이?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718230002228)
  3. ③ 가난에 빚지다
    1. • 아내는 임상시험 받다 떠났다..."비용 부담하겠다"는 말을 외면 못 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20180000909)
    2. • "분명 돈 때문인데, 돈 때문이어선 안 된다"...임상시험 '딜레마'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20230003739)
    3. • 임상시험 받던 아들은 왜 죽어야 했을까…6년 소송 엄마는 여생을 잃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721520002581)
    4. • '갈 길 먼' 임상시험 피해 보상...합의 안 되면 소송 말고 길 없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20250002324)
  4. ④ K뷰티의 그늘
    1. • "반찬값 벌려고" 최저시급에 피부 맡기는 4050 경단녀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716070001262)
    2. • 부작용 설명도 없이 "빨리 사인하세요"… 피부 시험 '대충' 해도 식약처는 뒷짐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20300003485)
    3. • "규칙 만들고 스스로 지킨다"…화장품 시험기관 '자율 관리' 한계 또렷하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20430001872)
    4. • '볼 패임, 가슴 볼륨 크림으로 메우세요'...과대광고 보증 서는 인체시험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717050002868)
  5. ⑤ 임상시험 강국으로
    1. • "어렵고 긴 설명서, 초등생도 이해할 수 있게 싹 바꿔야"...WHO '충고' [인터뷰]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21190002150)
    2. • "임상시험 강국 꿈꾼다면…참여자 권리부터 챙겨야"[인터뷰]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21220002148)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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