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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인의 심야 일지] “생각해 보니까, 죽을 때가 된 것 같아요”

조선일보 남궁인 이대 목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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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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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로 전원(轉院) 문의가 왔다. 2차 병원에 있는 50대 남성이 상대정맥 증후군이 의심된다고 했다. 상대정맥 증후군은 심장으로 들어가는 정맥이 막혀서 발생하는 질환으로, 대부분 악성 종양 때문에 생긴다. 다만 병을 모르고 있다가 발견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대체로 환자의 사정이 좋지 않다. 대학 병원 진료가 필요한 질환은 분명했으므로 우리는 환자를 받기로 했다. 전원을 문의한 의사는 환자가 기초생활수급자이며 보호자도 없다고 했다. 예상했던 상황이라 한숨이 나왔다.

환자는 다소 늦게 도착했다. 원무과 앞에 선 환자는 갑자기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를 마주하자마자 그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는 구겨진 현금 뭉치를 손에 쥐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큰돈은 아니었다.

“이 돈이 넘어가면 치료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낡은 옷차림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빠르게 치료 계획을 세웠다. 급여 1종이면 치료비의 자기 부담금이 아주 작다. 게다가 진단명에 악성 종양을 넣으면 산정 특례가 적용되어 사실상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다. 나는 돈을 넣어두는 대신 다짐을 받았다. 치료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치료만 잘 받으라고 했다. 환자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약속한다고 했다. 그의 접수를 원무과에 부탁했다.

자리로 돌아와 그가 가져온 CT 영상을 열었다. 폐에서 시작된 종괴가 상대정맥을 막아 호흡 곤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조금 더 종괴를 살펴보니 척추뼈 세 개를 침범했다. 일단 나는 산정 특례를 등록했다. 종괴가 척추까지 이어진 형태는 악성 종양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다. 앞으로 긴 치료가 필요했으므로 사정을 파악하러 갔다.

“영상을 확인했습니다. 폐암이 척추에 번졌습니다. 허리가 아프지 않았습니까?”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하나도 안 아팠는데요.”

척추를 침범한 종양은 안 아플 수가 없다. 불편한 환경이 만성적으로 이어지면 고통에 둔감해진다. 나는 그에게 직업을 물었다. 그는 직업이 기초수급자라고 답했다. 나는 진짜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수급자라는 단어만을 되풀이했다. 고시원에서 산 지 오래되었으며, 가족 없이 고아로 자랐다고 했다. 고시원엔 자신과 비슷한 수급자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반드시 항암 치료가 필요하니,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자리로 돌아왔다.


일단 상대정맥 증후군의 방사선과 약물 치료를 비교 분석한 문헌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삶 중 어느 하나도 내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치료가 순탄하지 않을 것 같았다. 수액과 진통제를 맞고 증상이 호전된 환자가 역시 갑자기 집에 가겠다고 했다.

“저랑 약속했잖아요. 힘들어서 오신 거잖아요.”

“막상 병원에 누워 있으니까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고시원에서 편하게 아픈 게 낫겠어요.”


“죽는다고요. 치료 안 받으면 고통스럽게 죽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죽을 때가 된 것 같아요. 그래서 괜찮아요.”

“아니….”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나는 환자의 수명을 늘리는 일을 하지만, 그는 자기 수명을 줄이겠다고 했다. 응당 나는 그의 말을 반박해야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엄밀히 그는 본인 의지로 치료를 거절했고, 강제할 방법도 없었으며, 현대 의학으로 완치할 수 있는 병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는 심적으로 그의 말을 이해해 버렸다. 승강이 끝에 나는 패배했다. 그는 자의 퇴원서를 쓰고 고시원으로 돌아가 버렸다.

자리로 돌아오자 아까 문헌이 그대로 열려 있었다. 의술의 발달은 많은 사람의 생을 도왔다. 그 의술을 실현할 수단은 이 병원에 모여 있다. 하지만 애초에 누군가에게는 그런 것이 의미가 없다. 건강을 관리하는 방법이나, 아프면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무의미하다. 그 앞에서 나는 때때로 방관자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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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인 이대 목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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