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뉴스
서울
흐림 / 8.8 °
연합뉴스 언론사 이미지

[여행honey] 도시의 작은 기적 '하늘공원'

연합뉴스 권혁창
원문보기
댓글 이동 버튼0
쓰레기산에서 하늘과 초원이 만난 억새 바다로
(서울=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키 큰 억새 사이로 난 작은 길. 하늘과 풀이 살갑게 맞닿고, 황금색 볕을 싣고 온 바람은 억새를 만나 가을 소리를 낸다.

10월의 하늘공원. 이곳은 도시가 만난 작은 기적이다.

하늘공원 억새밭 산책로 [사진/백승렬 기자]

하늘공원 억새밭 산책로 [사진/백승렬 기자]



291개의 '하늘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맹꽁이 열차는 8분, 하늘 계단은 20분. 건강이라는 실용적 가치에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일지 모른다는 상상력이 덧붙여진 계단을 거부할 명분은 없었다.

지그재그로 이뤄진 계단은 어디든 멈춰 서는 곳이 전망대다. 하늘이 따로 없었고, '여기가 바로 천국'이었다.

언젠가 자전거를 타고 와서 동그랗게 생긴 다리의 붉은 철제 난간 위에 앉아 쉬던 성산대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거짓말같이 푸른 하늘과 쉼 없는 강물 사이로 도시라는 빽빽한 현실이 펼쳐졌다. 하늘에 진심을, 강물에 지혜를, 성냥갑 같은 빌딩에 아량도 배워본다.


하늘공원으로 올라가는 291개의 '하늘 계단' [사진/백승렬 기자]

하늘공원으로 올라가는 291개의 '하늘 계단' [사진/백승렬 기자]



아무리 가팔라 보여도 시간은 늘 '순삭'이다. 계단이 끝나고 키 큰 나무 사이로 완만하고 길게 뻗은 산책로가 무릎도, 눈도 쉬게 한다.

차양이 긴 카우보이모자를 쓴 멋쟁이 남녀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서간다. 얼마 안 가 맹꽁이 열차 길과 만났고 곧이어 공원 입구가 나타났다.

정상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하지만, 북쪽 전망도 시원스럽다. 망월산, 북한산, 매봉산, 인왕산, 안산이 차례로 호명된다. 익숙한 이름인데, 여기서 보니 낯설다.


공원 입구, 늠름한 표지석이 등장했다. 여기가 하늘과 초원이 맞닿은 '하늘공원'이다.

하늘공원과 한강 다리 [사진/백승렬 기자]

하늘공원과 한강 다리 [사진/백승렬 기자]



하늘공원 표지석 [사진/백승렬 기자]

하늘공원 표지석 [사진/백승렬 기자]



◇ 유명 신혼여행지 '꽃섬'

오래전 서울 한강변에는 난지도(蘭芝島)라는 예쁜 이름의 섬이 있었다.


난지(蘭芝)는 난초와 지초를 합한 말이다. 모두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 이름이다. 사철 꽃향기가 나는 섬이라 '꽃섬'이라 부르기도 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꽃이 피어있는 섬이라는 뜻의 '중초도'(中草島)라고 기록돼 있다.

난지도가 1950∼1960년대 유명한 신혼여행지였고, 유명 배우들도 이곳으로 신혼여행을 왔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땅콩밭과 수수밭이 있었고, 소풍 온 학생들과 데이트 나온 선남선녀를 볼 수 있었던, 영화 촬영 명소였다.

그 난지도가 2002년 지금의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이 됐으니, 그 풍광의 아름다움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여기엔 15년이라는 삭제된 시간이 있다.

하늘공원에 설치된 난지도 옛모습 안내판 [사진/백승렬 기자]

하늘공원에 설치된 난지도 옛모습 안내판 [사진/백승렬 기자]



◇ 해발 90m '쓰레기 산'

'쓰레기 더미는 죽음의 산이다. 인간의 삶에서 부스러기가 되어 나온 주검들의 산이다. 그 산에는 살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맹렬하게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썩어가는 일과 썩어가는 냄새뿐이다. 그것만이 죽음도 정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정연희 '난지도' 중에서)

'쓰레기들은 더럽고 볼썽사나워 보였지만 검고 희고 붉고 푸르고 노랗고 알록달록 반짝이기도 하고 매끈거리기도 하며 네모나고 각지고 둥글고 길쭉하고 흐느적거리고 뻣뻣하고 처박히고 솟아나고 굴러내리고 매캐하고 비릿하고 숨이 막히고 코가 쌔하고 구역질 나고 무엇보다도 낯설었다.'(황석영 '낯익은 세상' 중에서)

1984년 난지도 쓰레기 하치장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1984년 난지도 쓰레기 하치장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난지도는 1978년부터 1993년까지 서울의 공식 쓰레기 매립장이었다.

15년간 서울시민이 배출한 모든 생활 쓰레기와 산업 폐기물이 쌓이고 쌓여 거대한 쓰레기 산이 됐다. 버려진 쓰레기의 양이 1억4천만t이다.

난지도 쓰레기 산은 시각적으로 불쾌감을 주는 것뿐 아니라 상상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선 먼지와 악취, 해충을 양산했다.

그 극한의 장소에도 사람이 살았다. 재개발로 대책 없이 쫓겨난 서민들이 쓰레기 더미 옆에 판잣집을 짓고 재활용품을 수거해 생계를 이었다.

난지도를 아는 세대는 그 이름을 꽃향기 나는 예쁜 섬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하늘공원에 활짝 핀 코스모스 [사진/백승렬 기자]

하늘공원에 활짝 핀 코스모스 [사진/백승렬 기자]



◇ 다시 꽃이 피다

이제 우리는 그 삭제된 15년의 풍경을 소설 속에서나 볼 수 있지만, 하늘공원과 노을공원 땅 밑에는 아직도 쓰레기가 묻혀 있다.

쓰레기 매립이 중단된 뒤에도 유독성 중금속이 다량 함유된 침출수가 한강으로 흘러나와 서울시민의 식수를 위협하기도 했다.

그 후 쓰레기 더미 위에 방수포를 씌우고 1m의 흙을 쌓아 다진 뒤 나무를 심었다. 침출수 유출을 막기 위해 콘크리트 벽을 세우고 물을 정화하고 유해 가스를 처리했다. 지금 공원에는 매립이송관로와 매립가스 포집 시설이 있다.

그렇게 쓰레기 산 위에 아름다운 공원이 생겨났다. 공원에는 다시 꽃이 피고 억새가 자랐다.

하늘공원 작가전원 전시물 [사진/백승렬 기자]

하늘공원 작가전원 전시물 [사진/백승렬 기자]



◇ '영혼을 위한 약국'

공원 입구에 들어서 왼쪽으로 핑크뮬리가 적지 않은 땅에 군락을 이뤄 심겨 있다.

사방이 트여 있고 적당히 습하며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잘 자라는 특성상 이곳이 적격일 수 있겠다.

그런데 왠지 이곳 핑크뮬리는 화려하지 않고 마치 아침 안개를 머금은 듯 흐리고 은은하다.

곧이어 눈앞에 등장하는 억새의 바다. 이제 제법 황금빛으로 제 몸을 바꿔 간다. 억새 숲 사이로 난 작은 길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중간쯤 가다가 사방을 둘러본다. 하늘 밑에 억새, 억새 밑에 흙이 있다. 각각 존재감을 뽐낸다. 세계는 처음부터 이 3가지로만 돼 있었다는 듯이.

하늘공원의 핑크뮬리 [사진/백승렬 기자]

하늘공원의 핑크뮬리 [사진/백승렬 기자]



불과 반시간 만에 도시는 사라졌고, 도시가 뿜어낸 번잡함도 사라졌다.

그새를 못 참고 도시가 그립다면 백보만 걸어가 보자. 거기엔 저 멀리 회색빛의 또 다른 숲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서 있고, 그 앞엔 한강이 고뇌하는 판관처럼 말없이 흘러가는 걸 볼 수 있다.

곳곳에 억새와 갈대의 차이를 설명하는 팻말이 있다.

똑같은 볏과의 여러해살이풀이지만, 억새는 줄기 속이 차 있고 키가 1∼2m, 잎에 흰색의 잎맥이 있지만, 갈대는 줄기 속이 비어있고, 키는 3m, 잎에는 잎맥이 없다.

무엇보다 꽃 색깔이 다르다. 억새가 황갈색이나 은빛 꽃을 피우는 데 비해 갈대는 갈색 꽃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늘공원 억새밭 산책로 [사진/백승렬 기자]

하늘공원 억새밭 산책로 [사진/백승렬 기자]



공원을 한 바퀴 돈 뒤 억새 숲과 한강 전망 지점을 지그재그로 오갔다. 해가 기울자 바람이 억새를 흔든다.

나가다가 표지석 부근에 '정원은 영혼을 위한 약국이다.-키케로-'라고 쓰인 팻말이 보인다.

땅 밑에 있는 쓰레기, 그 위에 있는 정원의 풀꽃. 인류가 존속하는 한 욕망은 계속될 것이고, 욕망이 있는 한 쓰레기도 버려질 것이다.

과도한 욕망이 영혼을 병들게 한다면 키케로의 말대로 정원이 치료 약이 될지도 모르겠다.

키케로가 이 팻말을 봤다면 2천년의 세월을 넘어선 아포리즘의 약효에 흐뭇한 웃음을 짓지 않을까.

하늘공원 조형물 [사진/백승렬 기자]

하늘공원 조형물 [사진/백승렬 기자]



Tip

하늘공원 입구에서 남쪽으로 1㎞가량 조성된 메타세쿼이아길은 '시인의 거리'라는 이름이 붙은 산책로다.

양쪽으로 메타세쿼이아가 호위병처럼 늘어선 사이로 꽃무릇, 수국, 삼색조팝, 옥잠화, 작약, 가우라, 비비추, 휴케라, 맥문동 등 형형색색의 꽃들이 경쟁하듯 화려함을 뽐낸다.

하늘공원에 올라가기 싫다면 시인의 거리만 걸어도 실패는 없다.

꽃무릇이 활짝 핀 하늘공원 메타세쿼이아길 [사진/백승렬 기자]

꽃무릇이 활짝 핀 하늘공원 메타세쿼이아길 [사진/백승렬 기자]



※ 참고 자료

1. 쓰레기장의 다크 에콜로지와 문학의 기록 : 난지도 소재 소설의 재발견(임태훈, 2020)

2. 난지도 쓰레기 매립지의 형성과 재활용 : 위생매립기술의 발견과 적용을 중심으로(배상희, 2020)

3. 공원의 위로(배정한, 2023)

4. '서울의 공원' 홈페이지(https://parks.seoul.go.kr/template/sub/worldcuppark.do)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5년 11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faith@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연합뉴스 앱 지금 바로 다운받기~
▶네이버 연합뉴스 채널 구독하기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info icon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AI 이슈 트렌드

실시간
  1. 1박나래 주사 논란
    박나래 주사 논란
  2. 2이이경 유재석 패싱 논란
    이이경 유재석 패싱 논란
  3. 3윤태영 웰터급 챔피언
    윤태영 웰터급 챔피언
  4. 4김민종 미우새 논란
    김민종 미우새 논란
  5. 5제주 잔류 수원
    제주 잔류 수원

연합뉴스 하이라이트

파워링크

광고
링크등록

당신만의 뉴스 Pick

쇼핑 핫아이템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