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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이라는 이름의 폭력 [생명과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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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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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따뜻함을 주는 반려동물부터 지구의 생물공동체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구체적 지식과 정보를 소개한다.


조교사가 소싸움 경기 도중 경기장으로 나오지 않으려는 소의 살코를 끌어당기고 있다. 동물해방물결 제공

조교사가 소싸움 경기 도중 경기장으로 나오지 않으려는 소의 살코를 끌어당기고 있다. 동물해방물결 제공


수년 전 EBS 여행 프로그램 촬영차 인도네시아에 간 적이 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 물소가 있었다. 화려하게 장식한 수레에 사람을 태우고 달리는 경주였다. 겉으론 축제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출발 신호와 함께 소는 등 뒤에서 내리치는 채찍과 쇠못 박힌 각목에 떠밀리듯 달렸다. 말리며 소리쳤지만 내 목소리는 환호에 묻혔다. 경기가 끝난 소들의 엉덩이는 피범벅이었고, 경주에 진 소는 주인의 주먹질을 맞았다. 촬영은 중단됐다. 그날 나는 '전통'이라는 말이 폭력을 가리는 화려한 포장일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얼마 전 한국의 소싸움 영상을 보았다. 청도 소싸움 경기장에서 촬영된 자료에는 피를 흘리거나 뿔이 부러진 채 쓰러진 소들이 있었다. 일부 장면에서는 패배한 소에게 전기충격기가 사용되는 모습도 포착됐다. 소싸움의 시작은 농한기에 함께 일한 '우리 소'를 자랑하던 마을 놀이였지만, 지금은 상설 경기장과 중계, 도박이 얽힌 구조가 됐다. 한국일보 보도에 따르면 싸움을 거부한 소가 41.2%, 출혈이 발생한 경기가 62.3%였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운영 상황도 문제다. 청도공영사업공사는 최근 10년간 약 350억 원의 누적 적자를 기록했고, 매년 보조금으로 메워왔다. 동물해방물결과 LCA의 실태조사에서는 일부 경기장에서의 불법 도박 정황과 승부 조작 의혹이 담겨 있다. 세금으로 그런 장면이 유지된다. 수의학적 기준으로도 소싸움은 명백한 학대다. 세계동물보건기구(WOAH)는 동물이 불필요한 고통과 공포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규정하고, 투우‧격투 상황을 분석한 연구(Mota-Rojas et al., 2021)는 급성 스트레스 반응과 심박‧체온 이상, 면역 저하를 반복적으로 보고한다. 과학적으로도 이 싸움은 '전통'이 아니라 '고통'이다.

세계는 이미 방향을 틀었다. 스페인은 2024년 국가 투우상을 폐지했고, 콜롬비아는 투우 금지법을 통과시킨 뒤 헌법재판소가 이를 확정했다. 멕시코시티는 살상 도구를 금지하는 '비살상 투우'로 전환했다.

오래되었다고 계속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름 아래 숨은 고통과 우리의 책임을 살펴보자. 전통은 박제가 아니다. 오늘의 윤리로 갱신되지 않으면 금세 악습이 된다. 소싸움을 멈추는 일은 하나의 행사를 지우는 결정이 아니다. 다음 세대에 무엇을 전통이라 부를지 정하는 일이다.


박정윤 올리브동물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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