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찬동 논설위원 |
영국 북서부의 항구 도시 리버풀. 혹자는 비틀스를, 혹자는 2024~2025시즌 프리미어리그 우승으로 20승을 달성한 축구 명가를 떠올릴 것이다. 개발 전문가들은 낡은 부두의 성공적인 도시재생 사례를 떠올릴지 모른다.
사실 이곳은 19세기 대영제국의 해상무역 중심지였다. 철과 벽돌로 지어진 '로열 앨버트 독'은 최신 창고 시스템을 갖춘 혁신적 항만이었다. 독일의 폭격 이후 폐허가 된 부두를 유네스코는 200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렸다. 하지만 시가 50억파운드를 투자해 '수변 개발 계획'을 추진하자 논란이 불거졌다. 특히 5만여 석 규모의 축구 전용경기장 건설로 옛 부두 일부가 훼손되자 유네스코는 2021년 등재를 철회했다. 그런데 세계유산 지위를 잃고 오히려 '문화도시'의 명성은 높아졌다. 철회 이후 관광산업이 21% 성장했고, 지역 고용도 13% 늘었다. 옛 부두는 '비틀스 스토리'와 테이트 리버풀 미술관 등 문화시설로 재탄생했다. 보존과 도시재생의 갈림길에서 리버풀은 현대 감각을 입힌 조화의 길을 선택한 셈이다.
서울 종묘 맞은편에 140m 빌딩 건설을 놓고 논란이 뜨겁다. 대법원은 서울시 계획에 절차상 하자가 없으며 "종묘 경관 보존을 이유로 전면 제한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서울시도 남산에서 종묘로 이어지는 녹지 축을 조성해 "종묘의 가치는 더 높아질 것"이라고 환영했다. 반면 국가유산청은 "건물이 하늘을 가리게 될 것"이라며 유네스코 등재 취소를 경고했다.
종묘는 조선 왕실의 위패가 모셔진 신성한 문화유산이다. 문화유산의 존재 이유는 시민이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데 있을 것이다. 박원순 전 시장 때처럼 세운지구를 방치하고 녹지도 없이 난개발하는 것이 종묘를 보존하는 길일지는 의문이다. 현재 전 세계 역사적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1100여 곳이 유네스코에 등재돼 있다. 해당 지역은 문화적 위상이 높아지고 관광 수입과 관련 일자리도 늘어난다. 노트르담대성당과 루브르궁이 있는 프랑스 파리, 런던타워와 웨스트민스터궁전이 있는 영국 런던은 사시사철 관광객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벨기에 브루게 구시가지와 이탈리아 로마, 이집트 카이로 구시가지는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산의 보존과 개발 방향은 지역 여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독일 드레스덴은 19세기 낭만주의 건축과 녹지가 어우러진 엘베강 주변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시는 도심 교통난 해결을 위해 다리 건설을 추진했고, 주민 투표에서 67.9%의 찬성으로 법원도 이를 허용했다. 유산도 중요하지만, 삶의 질도 중요하다고 주민들이 선택한 길이다. 다리 준공 후 교통 여건이 좋아지며 관광객 접근성도 개선됐지만, 유네스코는 경관 훼손을 이유로 문화유산 등재를 철회했다. 런던타워는 중세 요새와 왕궁, 감옥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됐다. "세계유산의 가치가 위협받는다"는 유네스코의 경고에도, 런던시는 금융 중심지의 위상 강화를 위해 인근에 주거와 업무·문화시설 개발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보존과 개발이 조화를 이루며 균형점을 찾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유산을 보존하되 시민이 그 가치를 누릴 수 있는 도시를 만드는 것 또한 서울시의 역할이다. 서울에 공간이 부족한데 낙후 세운지구의 개발을 전면 제한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결국 시민이 보다 나은 환경에서 문화유산을 누릴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국가유산청도 '무조건 안 된다'는 자세보다 서울시와 협의하며 유네스코와 소통 방안을 고민하길 바란다. 리버풀 사례가 보여주듯 문화유산은 '살아 있는 도시'와 함께할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서찬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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