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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내 도로를 개방하라[민서홍의 도시건축]

이데일리 최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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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 통제하는 대규모 아파트 탓 먼 길 돌아가기 일쑤
상권 약해지고 범죄에도 취약
개방 땐 지자체가 협력해 지역활력 회복 나서야
[민서홍 건축가] 단지 내 도로 개방은 단순한 통행 편의나 일부 주민의 이익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도시가 지향하는 공공성의 수준을 결정짓는 근본적인 과제다. 오늘날 대규모 아파트 재개발과 재건축은 도시 곳곳에 높은 담장을 둘러친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출입통제 단지)를 만들어 놨다. 외부인은 단지를 가로질러 다닐 수 없다. 반드시 우회해야 하며 때로는 출입구에서 경비원의 시선을 넘어야만 한다. 이러한 경험 자체가 도시생활 속 공존의 가치를 훼손한다. 과거 동네 골목길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공동체와 삶의 교류는 사라지고 잘게 조각난 사적 영역만이 남았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기존 마을의 골목 구조는 흔적도 없이 망가진다. 그 골목은 아이들이 뛰놀고 어르신들이 이웃을 살피던 생활의 무대였다. 그러나 단지화 과정에서 그 길은 철저히 폐쇄되며 통학로와 생활로는 단절된다. 아이들은 먼 길을 돌아 등하교해야 하고 노인과 보행 약자는 단순한 외출조차 힘들어진다. 단지 내 도로는 오직 입주민만의 차량 순환 통로가 되고 도시 전체의 도로망에서는 끊어진 채 유휴화한다. 결국 아파트 담장은 단순한 경계가 아니라 도시의 모세혈관을 막아버리는 혈전과 같다. 도시는 순환을 잃고 활력을 잃는다.

도로는 도시의 혈관이다. 심장에서 분출한 혈액이 모세혈관을 따라 세포 구석구석에 산소를 공급하듯 촘촘한 골목길과 연결망은 도시의 생활을 지탱한다. 그러나 대규모 단지가 길을 막으면서 도시는 혈류의 원활한 흐름을 상실한다. 지역 상권과 생활문화도 약화한다. 길이 끊기면 삶이 단절된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단지 내 도로는 ‘사유지’로 분류된다. 국가나 지자체가 관리하지 않고 입주자 대표회의 혹은 관리주체가 규약으로 통행을 통제한다. 법적으로는 도로이면서도 공공도로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모순적인 상황이다. 반면 외국의 사례는 전혀 다르다. 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들은 아파트 단지 내 도로조차 공공자산으로 둬 개발이익은 인프라로 재투자하고 거주민은 협동조합을 통해 관리에 참여한다. 일본 역시 도시계획법과 토지정리사업을 통해 단지 내 도로를 공공도로로 편입하는 제도를 명확히 운영한다. 한국의 배타적 도로 제도는 국제적으로도 이례적인 셈이다.

단지 내 도로 개방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다. 첫째, 고령화 사회에서는 보행환경 개선이 생존의 문제다. 노인과 아동은 먼 우회를 감내하기 어렵다. 길이 개방되면 학교와 병원, 버스정류장과 공원이 가까워진다. 둘째, 지역의 활력을 회복할 수 있다. 단지 도로가 주변 골목망과 연결되면 상권은 보행 흐름을 흡수하며 활성화한다. 셋째, 안전성도 제고된다. 닫힌 단지가 외부인으로부터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은 착각이다. 오히려 사람의 발길이 끊긴 곳이 범죄에 취약하다. 경찰청 환경 설계를 통한 범죄 예방(CPTED) 연구에 따르면 열린 공간에서 ‘눈길’이 늘어날수록 범죄 예방 효과가 강화한다. 개방은 위험이 아니라 안전의 조건이다.

물론 현실적 과제도 남아 있다. 주민은 유지비 부담, 보안 불안, 그리고 사유재산이라는 인식을 내세워 반대한다. 따라서 정책은 강제보다는 협력이 필요하다. 지자체가 유지관리 비용을 분담하고 개방과 함께 도로를 산책로·생활로로 재조성한다면 주민의 체감도는 달라질 것이다. 더 나아가 개방된 길을 커뮤니티 가든, 보행광장 등 다양한 생활공간으로 설계하면 주민도 이익을 체감할 수 있다. 공공성과 주민 편익이 동시에 확보되는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

결국 단지 내 도로 개방은 숨은 인프라를 해방하는 일이다. 길은 단지의 소유물이 아니라 도시 전체의 순환을 살리는 자산이다. 도시는 담장을 낮추는 순간 다시 숨을 쉰다. 오래도록 사람들은 벽을 세우며 안과 밖을 갈랐지만 사실 길은 처음부터 모두의 것이었다. 단지 안의 길을 열어두면 그 길은 다시 도시와 이어지고 사람들의 발걸음을 부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길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애초에 있던 길의 권리를 회복하는 일이다. 도시의 공공성은 그렇게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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