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한 날씨를 보인 지난 6일 오후 부산 사하구 다대포해수욕장 옆 생태 탐방로인 ‘고우니 생태길’에 황금빛 갈대밭이 펼쳐져 탐방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연합뉴스 |
이고운 | 부산 엠비시 피디
찬바람이 불면 쌓인 것들을 털어내고 싶어진다. 다가올 겨울이면 추위를 피해 집안에 오래 머물게 될 테니까. 어디선가 받은 물건들로 어지러운 책상, 오래 입지 않은 옷이 걸린 행거, 각종 잡화가 섞여 정신없는 서랍을 정리하고 싶다. 계절성 미니멀리즘이라고 해야 할까. 열린 창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주말 아침, 비워낸 자리가 오래가지 않을 걸 알면서도 쌓아둔 것들을 비우고 나면 마음이 개운해진다.
정리를 하다 보면 내가 얼마나 소비로 기쁨을 얻는 데 열심인지 깨닫게 된다. 할인율에 혹해 장만한 몸에 잘 맞지 않는 셔츠, 여행지에서 귀엽다고 사놓고도 포장 그대로 서랍에 넣어둔 배지, 도서전에 갔다가 큰맘 먹고 샀지만 읽다 만 책에 화석처럼 박혀있는 책갈피 같은 것들. 작게는 몇천원에서 크게는 몇만원까지, 도대체 이걸 왜 샀을까 싶지만 값을 치른 당시엔 분명 마음을 찰나의 기쁨으로 덥혔을 물건들이 넘쳐난다.
지불로 얻을 수 있는 쉬운 기쁨에 익숙해진 건 언제부터였을까. 어린 시절엔 돈 없이 온종일 재밌게 지내는 법을 알았던 것도 같은데, 언젠가부터 지불 없이 기쁨을 누리는 법을 잊어버린 것만 같다. 누군가 사들인 물건을 구경하고, 타인의 소비가 나의 지향이 되는 일이 숨 쉬듯 자연스러운 요즘, 돈으로 산 기쁨이 잦아질수록 행복한 일상에 필요한 건 돈이라는 납작한 명제에 익숙해진다.
그런 명제는 도시의 풍경에도 녹아들기 마련인지, 곳곳에 비싼 가격표가 달린 경험들이 넘쳐난다. 수도권에만 있다가 처음으로 우리 지역에 생겼다는 유명 카페, 이 공간에서의 경험이 당신의 정체성이 된다고 외치는 상점, 하이엔드니 프리미엄이니 하는 영어단어가 덕지덕지 붙은 아파트. 값을 치른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경험인데도, 그 값비싼 경험의 총합이 커질수록 이 지역의 가치가 올라간다는 이상한 믿음이 도처에 널려있다.
계절성 미니멀리즘의 힘을 빌려 공간을 정리하다 보면, 지불로 얻을 수 있는 기쁨의 덧없음과 실은 내가 진짜 얻고 싶었던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내게 필요했던 건 가까운 공원을 걷다가 낙엽을 밟을 때 나는 소리, 함께 사는 사람과 새롭게 만든 유치한 농담, 산책길에 기분이 좋아 공중을 나는 듯 뛰는 강아지의 표정을 보는 일 같은 게 아니었을까.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들여야만 발견할 수 있는 기쁨. 일상에 지친 내가 필요로했던 것은 가격표가 달리지 않은 그런 기쁨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역의 풍경을 빚는 일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떻게 해야 지역민 모두가 이곳에서 만족하며 살 수 있을지 공들여 고민하지 않으면, 무작정 뭔가를 개발하고 채워야만 지역이 발전한다는 믿음에 갇히기 쉽다. 화려한 마천루가 많아진다고, 돈으로 살 수 있는 경험이 많아진다고 해서 도시에 사는 모두의 삶이 풍성해지진 않는다. 오히려 살기 좋은 지역을 만드는 건 지역민이라면 누구나 지불 없이도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만드는 일에 더 가깝지 않을까.
아름다운 바다 근처에 자꾸만 솟아나는 새로운 아파트, 조금이라도 낡은 동네엔 어김없이 붙어있는 재개발 플래카드, 소비를 해야만 경험할 수 있는 공간만 불어나는 것 같은 요즘, 소중한 이 도시 곳곳에 부산 사람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많아지면 좋겠다. 지폐 한장 없이도 남녀노소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 곳곳에 존재하기를 바란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경험의 총합으로 지역의 가치를 따진다면, 자본과 사람이 몰린 서울을 제외한 모든 지역은 무의미한 따라잡기만 하게 될 테니까. 그런 경쟁을 멈춘다면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우리는 저마다 어떤 터전을 그려볼 수 있을까. 지역민 누구나 지불 없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 넘치는 도시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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