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드골. |
1969년 4월 28일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1890~1970)은 전격 사임을 발표했다. 전날 실시한 상원 개혁안·지방 제도 개정안 국민투표가 찬성 47%, 반대 53%로 나온 직후였다. 사임 발표 성명은 단 두 문장이었다.
“나는 공화국 대통령으로서의 직무 수행을 정지한다. 이 결정은 28일 정오를 기해 발효된다.”
1958년 12월 21일 대통령 취임 후 10년여 만에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드골은 결정적 순간마다 신임을 직접 묻는 국민투표를 통해 위기를 넘었다. 1958년 9월 강력한 권한을 갖는 대통령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76% 찬성을 얻었다. 군부 및 우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식민지인 알제리 독립을 국민투표에 부쳐 91% 찬성을 얻었다.
드골 대통령 하야. 1969년 4월 29일자. |
이번에도 진퇴를 걸고 국민투표를 했지만 실패였다. 굳이 상원 개혁안 같은 사안에 대통령직을 걸 필요가 있었나 하는 지적도 나왔다.
“위기를 맞을 때마다 ‘나냐, 혼란이냐?’를 내걸고 번번이 그것을 극복해온 샤를르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국민의 불신 속에서 어처구니 없는 국민투표에 패배하고 28일 물러났다. 어처구니 없다는 것은 이번의 국민투표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걸만한 가치가 있었느냐 하는데 대한 의문 때문이다.”(조선일보 1969년 4월 29일 자 A3면)
드골의 사망 역시 갑작스러웠다. 퇴임 후 1년 6개월 지난 1970년 11월 9일 고향 마을인 콜롱베레되제글리즈 자택에서 별세했다. TV 뉴스 방송을 기다리다가 탁자 앞으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부음을 전한 조선일보 1면 톱 제목은 ‘드골 急逝(급서)’ 네 글자였다.
드골 급서. 1970년 11월 11일자. |
“프랑스 전 대통령 샤를르 드골 장군이 9일 오후 7시30분(한국시각 10일 오전 3시30분) 그의 향리(鄕里)인 콜롱베 데제 글리제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79세. 오늘 22일로써 80회 생일을 맞을 예정이던 드골은 1969년 4월의 국민투표에서 패배한 이래 그의 향리에서 은거해왔으며 그간 ‘희망의 회고록’이라는 그의 회고록 집필해왔다.”(1970년 11월 11일 자 1면)
드골은 2차 대전 때 독일에 항전하며 지도자로 떠올랐다. 1940년 6월 프랑스 정부가 독일에 항복하자 이에 불복하고 런던으로 망명했다.
드골은 프랑스군 준장과 외무차관을 지냈지만 당시 프랑스인에게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다. 런던에서 ‘자유 프랑스 위원회’를 설치하고 대독 항전을 호소했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와 영국 수상 처칠은 노골적으로 드골을 냉대했다. 루스벨트는 드골을 가리켜 “잔 다르크를 자처하는 사나이”라고 무시했다.
프랑스가 전후 승전국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드골을 중심으로 항독 레지스탕스 활동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드골의 야심. 1964년 3월 19일자. |
드골은 대통령 취임 후에도 ‘위대한 프랑스’를 내걸고 미·영과 갈등도 불사했다. 드골은 “영국은 미국의 51번째 주”라고 비꼬고 “미국은 강하지만 바보”라고 조롱했다. 그는 “위대함이 없을 때 프랑스는 진정한 프랑스가 될 수 없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중도파는 더욱 아니다. 나는 그 이상이다”라고 했다.
독자적인 핵무장에 나서고 미국의 반대에도 중공과 수교했다. 1964년 3월 19일 자 조선일보는 ‘세계 판도를 변형시키려는 드골의 야심’이란 기획 기사를 썼다. 부제는 ‘미·소 세력권에 도전하는 새로운 중립권 추진/ 동남아·중남미·아프리카를 묶어’ ‘제3세계 구상의 밑바닥/ 이데올로기보다 민족을 중시’라고 달았다.
“불란서의 영광, 나아가서는 구주(유럽)의 힘을 부활시켜 국제무대에서 다원적인 세력 균형을 이룩해보려는 드골 불란서 대통령의 정책은 동서 양 진영의 정점을 이루고 있는 미소와 서방 세계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미영에 대한 거창한 도전이 되고 있다. 불란서가 작년에 취한 영국의 구주공동시장(ECC)에의 가입 거부, 나토 핵군(核軍) 참여의 반대, 미영소를 중심으로 한 부분적 핵금협정의 반대 및 인도지나 반도의 중립화 제안과 금년에 들어 큰 파문을 일으킨 중공의 승인 등은 모두가 신 얄타체제의 구축 및 앵글로색슨 계의 서방 지배에 대한 선구적인 반발이라고 볼 수 있다.”(1964년 3월 19일 자)
불멸의 거성 드골. 1970년 11월 11일자 3면. |
드골은 미국에 어깃장을 놓으며 프랑스를 강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고집스러운 인물이었다. 당시 신문도 고집과 야심을 자주 제목으로 뽑았다.
‘고집장이 선각자’ ‘초연한 불란서의 거인’(1959년 11월 11일 자 2면)
‘독자 핵군(核軍) 강행하는 고집 철학’ ‘웅대한 꿈 구주(유럽) 제일’(1964년 1월 15일 자 3면)
‘위대한 야심, 투명해진 배미(排美·미국 배척) 태도’(1964년 11월 24일 자 3면)
‘대서양에서 우랄산맥까지’라는 슬로건으로 옛 영광을 되찾으려는 드골의 프랑스 민족주의는 ‘(드)골리즘’이라고 불리며 찬반 논란을 일으켰다. 임기 중 여섯 차례 암살 위기를 겪기도 했다. ‘독재자’라는 비난도 받았다. 그러나 물러날 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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