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
지난주 천년 고도, 경주에서 33회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의장국인 우리나라의 이재명 대통령이 주재하면서 무난하게 일정이 끝났다. 초미의 관심사는 무역관세정책으로 세계 경제의 판을 흔들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얼어붙어 있는 한중 관계에서 11년 만에 국빈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일거수일투족이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 정상들과 관료들의 회의와 만남들이 세계에 실시간으로 중계됐다. 며칠간 세계 언론의 귀와 눈은 온통 경주에 집중되었다. 세계 경제를 이끄는 최고경영자들이 줄지어 방한해 우리나라의 인공지능(AI) 발전에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우리나라가 과학과 기술, 특히 반도체 강국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오늘날 세계는 적과 동지가 혼합된 채 치열한 경쟁을 하는 경제와 기술의 전쟁터와 같다.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라는 바로 도태되고 만다. 지난 9월 미국의 한 시사주간지에서 대한민국을 2024년 전 세계 6위의 국력을 지닌 국가로 평가했다. 나는 정치나 경제에 문외한이지만 이런 소식들은 초등학생 어린이가 좋은 성적표를 받아든 것처럼 마냥 기쁘다.
나는 외국 여행도 자유롭지 못하던 1980년대 중반 유럽에서 유학하면서 외국인들을 처음 만나면 늘 듣던 말이 생각난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그들은 항상 "한국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 그러면 한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존재감이 아예 없는 것 같아 그런 인사를 건넨 날은 종일 기분이 우울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발전과 부흥에는 우리의 부모님, 선배 세대들의 피와 땀, 눈물이 씨앗이 되었음을 잊어선 안 된다. 실제로 우리 세대의 부모님들 중에는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도록 논과 밭을 팔아서라도 자식을 공부시킨 분이 많았다. 높은 교육열이 우리나라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우리나라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준 나라도 늘 기억해야 한다. 미국, 캐나다, 필리핀, 프랑스, 에티오피아 등 16개국이 한국전쟁 때 실제 전투에 참가해 전사한 외국의 젊은이만 5만여 명에 이른다. 예전에 학교 시험에도 자주 나와 한국전쟁 참전국 16개국은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인도·노르웨이 등 의료지원국 6개국, 오스트리아·대만·바티칸시국 등 39개국이 많은 재정과 물자를 지원을 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되어 마음으로 무척 창피했다.
우리나라 국민들도 국가를 재건하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들의 자리에서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낯설고 물선 독일 땅에서 수많은 이들이 광부와 간호사로, 많은 가장들이 숨막히는 중동의 거친 사막에서 땀을 흘리며 근면성실하게 묵묵히 일을 했다. 우리나라 자유민주주의 발전과 정착을 위해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고군분투했다. 내가 귀국할 때 중간 기착지인 두바이의 공사 현장에서 한 다리를 잃은 분이 옆자리에 탔다. 자신은 장애를 입었지만 가족들이 조금 더 편하게 살게 되어 후회는 없다고 한 그분의 말이 30여 년이 지났지만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정진석 추기경은 전쟁과 폐허에서 주린 배를 움켜 잡고 일했던 선배 세대들과 절체절명의 순간에 도움을 주었던 외국의 은혜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고 자주 이야기했다. 정 추기경은 그 말을 할 때마다 눈에 이슬이 맺히곤 했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유일한 나라가 된 것은 저절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우리 모두 이름 모를 수많은 이들의 희생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갚는 것은 인간의 기본 도리다. 이제는 우리나라가 세계 속에서 좋은 역할과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