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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어깨 너머의 날씨[박연준의 토요일은 시가 좋아]〈14〉

동아일보 박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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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안쪽은 이미 어두워졌는데 아직 내려오지 않은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비 그치면 내려오거나 비 그쳐도 내려오지 않기로 한 것이 머루를 따 먹으며 손톱이 까매지도록 앉아

바위벽을 타고 오르는 도마뱀 발톱 소리를 듣고 있을 것 같았다.

어둔 굴 안에 젖은 콧등을 움찔거리는 것이 있고 안개는 사람 냄새를 맡으러 걸어 다니고

새벽 일찍 수로를 살피러 온 노인이 나무 아래를 들여다보면 안광이 빗물에 씻긴 머루알처럼 빛나는 누가 앉아있을 것 같았다.

(후략)

―김미령(1975∼ )



등 뒤가 허전할 때, “왼쪽 어깨 너머의 날씨”처럼 수상한 배후를 감지하고 더듬이가 길어질 때가 있다. 시의 화자는 이미 어두워진 숲 안쪽에서 “아직 내려오지 않은 것”을 감지한다. 그가 누구인지, 사람인지 짐승인지 죽은 이의 영혼인지 알 수 없다. 종이를 찢고 흘러내릴 것 같은 예감으로 가득할 뿐이다. 근거는 없지만 징후로 가득한 이 시는 매력적이다. 읽는 이를 홀리게 하여 어떤 기미 속에서 헤매게 만든다.

자명한 건 목소리뿐이다. 고요한 일상에 파편처럼 내려앉은, 슬픔의 징후를 찾는 목소리. 무엇도 모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알아채는 목소리. “사람 냄새를 맡으러 걸어 다니”는 안개의 축축한 움직임까지 감지하는 목소리다. 지면상 생략된 시의 후반부에는 “아직 내려오지 않은 것”일지도 모를 누군가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실체는 분명하지 않지만 기다림 속에서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 뜨거운 것을 떠먹는 것, 신기루처럼 존재하는 것이 나온다. 읽을수록 더 읽고 싶은 시가 있다. 알 것 같아서 그렇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알 것도 같아서 그렇다. 중요한 건 예감이다. 모른 채 알아채는 일이다.

박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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