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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정 회귀 없는 민주주의” 못 박은 선언문 발표

조선일보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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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자료로 되짚는 이승만의 생애]
⑤첫 공식 외교 기관 ‘구미위원부’
“대한공화국(Republic of Korea) 집정관 총재인 나 이승만은 우리 국민의 일치된 요구와 구미위원부의 승인에 따라 1919년 8월 27일 자로 ‘한국 민족의 지속적인 독립 선언 및 독립 요구문’을 발표했음을 공표합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5개월이 지났을 무렵, 이승만은 미국에서 한국의 임시정부 격인 ‘대한공화국’의 집정관 총재에 취임했다. 정부 수반 격이다. ‘임시’라는 말을 쓰지 않은 것은 국가로서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서울과 노령(연해주), 상하이에서 각각 임시정부가 조직되던 상황이었다.

1919년 함께 촬영한 이승만(왼쪽) 대한공화국 집정관 총재와 김규식 구미위원부 위원장. 두 사람은 ‘독립 외교’의 길을 함께 열었다./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

1919년 함께 촬영한 이승만(왼쪽) 대한공화국 집정관 총재와 김규식 구미위원부 위원장. 두 사람은 ‘독립 외교’의 길을 함께 열었다./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


◇독립 외교의 시작, 구미위원부

이 단계에서 이승만은 민족의 대표성을 띤 공식 외교기관의 출범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에 독립 외교 전담 기관으로 구미위원부(Korean Commission)를 창설했다. 이것은 주권을 상실한 민족이 독립을 목표로 대사관이나 공사관 대신 한시적으로 운영했던 특수한 형태의 외교기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해 8월 25일 설립을 공포한 구미위원부는 27일 ‘독립 선언 및 독립 요구문’의 발표와 함께 공식 출범식을 가졌다.

한국 독립 외교의 시작을 알린 이날 출범식에 관련된 자료가 최근 발견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미공개 이승만 자료 정리 사업’을 통해서다. 이승만이 소장하고 있던 이 문서는 출범식의 내용, 독립 선언 및 요구문의 원본, 그것에 대한 공표문으로 이뤄져 있다. 독립 선언 및 요구문의 사본은 2007년 공개된 바 있지만 이승만의 친필 서명과 대한공화국 인장이 부착된 원본은 처음 나온 것이며, 출범식의 내용과 순서 역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이날의 개회사는 대한공화국 집정관 총재 이승만이 맡았고, 구미위원부 직원 임병직이 사회를 맡았다. 출범 기념 기도는 구미위원부 초대 위원인 목사 이대위가 맡았다. 출범식의 하이라이트는 독립을 위한 외교문서 서명식이었는데 ‘한국 민족의 지속적인 독립 선언 및 독립 요구문’을 구미위원부 초대 위원장 김규식이 낭독했다. 이승만과 김규식은 미국 국무부와 상하원 외교위원회에 보낼 영어 사본, 클레망소 파리평화회의 의장에게 보낼 프랑스어 사본, AP 등 언론사에 보낼 사본에 모두 서명했다.

구미위원부 설립 직후인 1919년 8월 27일 ‘독립 선언 및 독립 요구문’의 발표를 알린 공표문 원본./연세대 이승만연구원

구미위원부 설립 직후인 1919년 8월 27일 ‘독립 선언 및 독립 요구문’의 발표를 알린 공표문 원본./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전제정 회귀 없는 민주주의 체제로”

이 선언문은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할 미래 한국의 체제가 ‘민주주의’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은 전 인류의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중대한 순간이다.” “일본 제국의 일부로서는 자유롭게 발전할 수 없기에 우리는 이 선언을 통해 한국 민족의 지속적인 자유와 독립에 대한 선언과 요구를 엄숙히 주장하는 바다.”


선언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우리는 지금의 민주주의 시대와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전제(專制) 정부와는 정치적으로 어떠한 연계도 거부한다.” “우리의 헌법과 기본 법령은 민주적, 효율적, 합리적 정부 그리고 정의로운 정부를 명문화할 것이며, 이 정부는 특권과 계급 지향적 법률 제정을 배제할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믿는다. 우리는 자유를 믿는다.”

비장하고 힘차면서도 논리를 갖춘 문장을 통해, 절대로 과거의 왕정이나 제정으로 회귀하지 않을 것을 밝히면서 민주주의와 자유의 가치를 독립 외교의 핵심으로 삼아 국제사회에 호소했던 이승만의 확고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승만이 대한민국 수립 이후 그토록 대한제국 구 황실에 냉담했던 이유도 여기서 알 수 있다. 이승만에게 민주주의 체제로의 전진은 한마디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간 것이었다.

구미위원부 출범식 직후인 1919년 9월,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정부의 수반인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이승만이 세운 구미위원부를 임시정부의 공식 외교기관으로 인정했다.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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