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 |
‘마왕’이라 불리는 가수 신해철(1968~2014)은 세상 떠나기 석 달여 전 조선일보와 인터뷰했다. 신곡 4곡을 담은 미니 앨범 ‘리부트 마이셀프(Reboot Myself)’를 내고 서울 서교동 한 카페에서 대중음악 담당 기자와 만났다. 넥스트 6집 이후 6년만에 낸 앨범이었다.
신해철은 체중이 많이 불어있었다. 앞서 큰 수술을 두 번 받았다고 했다. 간을 반 정도 잘라내고 쓸개를 떼어냈다. “체중이 느니까 베이스가 네 음 정도 더 내려가는 거예요. 그래서 ‘살찐 김에 녹음이나 하자’고 했죠.”(2014년 7월 4일자 A21면)
사망 석 달 전 신해철 인터뷰. 2014년 7월 4일자 A21면. |
석 달 후 부고가 오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날 신해철을 인터뷰한 한현우 기자는 “곧 다시 만나자던 그는 느닷없는 부음의 주인공이 됐다”며 “늘 쾌활하고 수다스럽던 그가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 슬프고도 낯설다”고 애도했다.
신해철이 1988년 대학가요제 대상을 타고 데뷔한 이후 조선일보와 인터뷰한 기사는 모두 14건이다. 1996년엔 3차례 인터뷰했다. 다른 언론사와 함께 인터뷰한 때도 있을 것이다. 따로 사진을 찍고 긴 인터뷰 기사가 실린 점 등을 고려하면 조선일보 단독 인터뷰는 최소 8번이다.
윤상과 함께 공동 앨범 '노 댄스'를 낸 신해철. 1996년 10월 20일자. |
신해철이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공개 지지하고 소위 진보적 연예인으로 떠올랐을 때 이른바 386세대 중 일부는 어색하게 느낀 이도 있었다. 한현우 기자는 신해철에 대해 애정을 담아 쓴 ‘애도, 음악가 신해철’ 글에서 이런 사실을 적시했다.
“386세대들이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우민화(愚民化)의 최고 상품으로 유치한 이벤트’라고 불렀던 88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그는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나는 언제나 그대 곁에 있겠어요”라고 노래했다. 지금 대학생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 당시에 ‘서강대씩이나’ 다니면서 그런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것은 ‘백만 학도’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2014년 10월 30일자 A33면)
신해철도 사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현우의 팝 컬처 '애도, 음악가 신해철'. 2014년 10월 30일자 A33면. |
“나는 386세대라고 말할 자격이 없어요. 88년에 대학가요제 나가서 사랑 타령을 했으니 말이죠. 그때도 분명히 욕을 먹을 거라고 생각했었죠. 그렇지만 음악을 너무 좋아했고, 대학에 가면 제일 먼저 해보고 싶었던 게 대학가요제였어요. 그래서 후회는 안 해요. 오히려 눈치 보느라 대학가요제에 안 나갔더라면 평생 후회했을 거예요.”(2014년 10월 30일자 A33면)
신해철은 2007년 인터뷰에서 “이번 대선에선 후보에 대한 공개 지지를 하지 않겠다”며 여야 모두를 비판했다.
2007년 1월 19일자. |
“좌파든 우파든 ‘저 놈 되면 나라 망한다’는 얘기는 그만 했으면 좋겠어요. 제발 정치하는 사람들 좀 세련돼졌으면 하고요. 아직도 치고받고 창피해서 원. 여당 야당 가릴 것 없이 왜들 다 그런지….”(2007년 1월 19일자 A21면)
2008년 인터뷰에선 “난 보수도 진보도 아닌 원칙론자”라고 말했다.
“내가 주장하는 얘기는 전부 원칙과 기준에 대한 얘기다. 우리보다 앞서 실험을 했던 다른 국가들에서 검증이 된 만국 공통의 스탠더드라는 거지, 내가 옳으니 나를 따르라는 것이 아니다.”(2008년 3월 15일자 B9면)
넥스트 리더 신해철. 1997년 11월 27일자. |
어쩌면 신해철은 일관된 태도를 보였는지도 모른다. 억압하는 것에 대한 저항 또는 투정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신해철은 아이돌 음악과 팬덤에 대해서도 독설을 날렸다.
“팬덤이 점점 저질화되는 것을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 건 정말 웃기는 거예요. 서태지에서 H.O.T와 g.o.d를 거쳐 동방신기로 가면서 점점 저질화하는 것 같아요. 아이돌 팬덤의 특질은 권력에 대한 욕망이죠. 방송국 가서 다른 가수 노래할 때 박수 안 치고 침묵하는 이런 저질 팬이 세계 어디에 있어요?”(2008년 12월 5일자 A20면)
신해철은 ‘그대에게’로 데뷔 이후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 ‘재즈 카페’ 등 히트곡을 내며 대중 가수로 성공했다. 솔로 2집 ‘Myself’부터 뛰어난 음악인으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밴드 음악을 하며 저항적인 록 정신과 실험적인 음악에도 도전했다. “록과 일렉트로닉이란 굵은 줄기로 뻗어가면서 자잘한 재미와 위트를 선보인 그는, ‘좌파 연예인’이 아니라 한국 최고의 음악가 중 한 명”(한현우)이었다.
박노해 시집 '노동의 새벽' 20주년 공연 음반 기획한 신해철과 강헌. 2004년 12월 10일자. |
신해철과 함께 ‘박노해 노동의 새벽 20주년’ 헌정 음반을 함께 기획했던 음악평론가 강헌은 2018년 책 ‘신해철’을 냈다. 강헌은 신해철에 대해 “집요한 광기와 좌충우돌의 불화, 해학적이기까지 한 허세와 대책 없는 섬세함까지 갖춘, 대한민국의 1980년대가 분만한 가장 모순적인 열정을 지닌 청년”이라고 했다.
신해철은 46세 때인 2014년 10월 27일 장 협착 수술을 받는 과정에서 의료 사고로 인한 부작용으로 사망에 이르렀다. 부조리극 같은 죽음이었다.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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