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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고 긁고 뚫고…붓을 내려놓자 그림이 시작됐다 [국현열화 30]

이데일리 오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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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가서 종이화가로…경계 지운 작가 '권영우'
동양화 전공한 서울대 미대 1기생
수묵 버리고 눈앞 일상 장면 관심
60년대 한지 찢고 오린 작업 본격
동양화 방식으로 서양화식 콜라주
교수직 내놓고 뒤늦은 파리 유학
종이물성 탐구 한국화 새 문법 써
말년엔 일상사물에 종이붙이기도
권영우의 ‘무제’(1985). 붓과 먹을 버리고 ‘그리기’를 하지 않은 회화작품이다. 한지를 찢고 뚫고 붙이면서 화면 위 다양성·우연성에 집중하는 ‘종이작업’으로 수묵이 바탕인 동양화·한국화의 영역을 과감하게 확장했다. 50대에 뒤늦게 떠난 프랑스 파리 유학 중에 제작한 이 작품은 자연발생적인 농담에 의한 색면이 도드라진다. 먹과 구아슈를 혼합한 반투명 청회색 물감을 종이 뒷면에서 올려 한지 위로 배어 나오게 했다. 화면이 물들어가는 흔적을 따라 번지고 수축하고 유동하는 이미지들이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을 감각적인 세계를 펼쳐내고 있다. 지난 6월 26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한 ‘MMCA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Ⅱ’에 걸렸다. 한지에 구아슈·먹, 224×17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권영우의 ‘무제’(1985). 붓과 먹을 버리고 ‘그리기’를 하지 않은 회화작품이다. 한지를 찢고 뚫고 붙이면서 화면 위 다양성·우연성에 집중하는 ‘종이작업’으로 수묵이 바탕인 동양화·한국화의 영역을 과감하게 확장했다. 50대에 뒤늦게 떠난 프랑스 파리 유학 중에 제작한 이 작품은 자연발생적인 농담에 의한 색면이 도드라진다. 먹과 구아슈를 혼합한 반투명 청회색 물감을 종이 뒷면에서 올려 한지 위로 배어 나오게 했다. 화면이 물들어가는 흔적을 따라 번지고 수축하고 유동하는 이미지들이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을 감각적인 세계를 펼쳐내고 있다. 지난 6월 26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한 ‘MMCA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Ⅱ’에 걸렸다. 한지에 구아슈·먹, 224×17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문득 사는 일을 돌아보니 그랬습니다. 지켜내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오롯이 세월을 지키는 일 말입니다. 한국미술이 먼저 떠오릅니다. 척박한 세상살이에 미술이 무슨 대수냐고, 그림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데일리가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그 쉽지 않았던 한국근현대미술 100년을 더듬습니다. 이건희컬렉션을 입고 더욱 깊어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통해섭니다. 5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과천에서 ‘MMCA 상설전’이란 타이틀 아래 미련 없이 펼쳐내는 300여 점, 그 가운데 30여 점을 골랐습니다. 주역을 찾진 않았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오롯이 세월을 지켜온 작품을 우선 들여다봤습니다. ‘열화’입니다. ‘뜨거운 그림’이란 의미고, ‘식을 수 없는 그림’이란 의지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주
>

[정하윤 미술평론가] 화가가 붓을 내려놓는다면 그림은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권영우(1926∼2013)의 예술은 이 질문에서 출발했다. 모두가 전통의 붓끝을 붙잡고 있을 때 그는 과감히 그 붓을 내려놓았다. 대신 화선지를 찢고 누르고 겹치며 ‘그리지 않은 그림’을 만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형식의 변주가 아니라 생각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일이었다.

1926년 함경남도 이원에서 태어난 권영우는 보통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만주의 룽징(용정)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성장했다. 룽징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함경북도 출신으로 중국 연변에서 활동하던 화가 석희만(1914∼2003)에게 그림을 배우며 미술에 관심을 가졌다. 일찍이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으며 두각을 나타냈지만 지린(길림)사범대 미술교육과에 지원했다가 떨어지고 잠시 장춘영화사에서 일을 했다. 이후 가족이 있는 경기도 양주로 돌아와 한동안 미술과는 동떨어진 생활을 이어갔다. 오래도록 마음에 품었음에도 미술에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던 시기였다.

서양화과 수업 기웃거린 동양화과 학생

광복 후 서울로 이주한 권영우는 1946년 서울대 미대 제1기로 입학했다. 드디어 그림 앞에 매일 설 수 있게 된 거다. 세부 전공은 동양화였지만 당시 서울대 미대는 동양화와 서양화를 엄격히 구분하지 않고 제1회화과, 제2회화과로 나누고 있었다. 같은 회화인데 굳이 동양과 서양을 구분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초대 학장 장발(1901∼2001)의 판단에서였다. 이에 공감한 권영우는 동양화를 전공하면서도 서양화과 학생들이 누드모델 앞에서 작업하는 강의실에 들어가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동양화 수업시간에도 전통적인 화조도나 산수화에서 벗어나 눈앞에 보이는 일상의 장면에 관심을 두고 작업했다.

작품에만 집중하고 싶었지만 시대는 혼란스러웠다. 일제강점기부터 있던 여러 단과 대학을 통합해 단일 종합대인 국립서울대를 만든다는 계획에 반대하는 운동(국대안 파동)이 거세지면서 교정은 어수선했고, 곧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학 수업은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권영우는 대구와 부산에서 종군미술가로 활동하며 전쟁 시기를 보냈고 부산에 설치한 임시 교정에서야 졸업할 수 있었다.

이처럼 1950년대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하지만 달리 보면 이것이 오히려 권영우에게 기회가 되었다. 엄격한 전통이나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작업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보수적이던 동양화단에서 이런 느슨한 분위기는 주제나 기법에 구속받지 않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기회가 됐다. 실제로 권영우는 졸업전시에 화선지에 먹으로 그린 자화상을 출품했는데, 3차원의 입체감과 명암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마치 목탄이나 연필로 그린 듯한 느낌을 줬다. 이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서양화와 동양화를 대립적으로 보지 않던 환경에서 나올 수 있었던 실험적인 작품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권영우는 다시 상경해 대학원에 입학했고 이후 성신여고와 휘문고교에서 교사로 일하며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 작품활동도 궤도에 올랐다.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입선한 것을 시작으로, 제6회까지 연속으로 입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958년 제7회와 이듬해 제8회 국전에서는 연이어 문교부장관상을 받으며 화단의 주목을 받았고, 제9회 국전에서도 특선을 차지했으며, 제10회에는 추천작가로 출품했다. 현재는 ‘국전’ 제도 자체가 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단연 대한민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공모이고 전시였다. 학생부터 원로작가까지 모두가 출품했고 누가 어떤 상을 받는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던 그때가 바로 권영우가 ‘국전’에서 활동하던 시기였다.

권영우의 ‘폭격이 있은 후’(1957). 한국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0년대 후반 작업으로 현재 많이 남아있지 않은 작가의 초기작 중 하나다. 황량한 공간감 속에 탱크와 널브러진 나뭇가지들이 어지럽게 화면을 가로지르고 있다. 먹의 농담을 통해 서양화처럼 근경·중경·원경을 구분하면서 한국화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고민과 실험정신을 드러냈다. 종이에 먹, 146×183㎝.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권영우의 ‘폭격이 있은 후’(1957). 한국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0년대 후반 작업으로 현재 많이 남아있지 않은 작가의 초기작 중 하나다. 황량한 공간감 속에 탱크와 널브러진 나뭇가지들이 어지럽게 화면을 가로지르고 있다. 먹의 농담을 통해 서양화처럼 근경·중경·원경을 구분하면서 한국화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고민과 실험정신을 드러냈다. 종이에 먹, 146×183㎝.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 무렵 미술계의 구호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일제 잔재의 청산’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민족미술의 수립’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한국의 여러 동양화가들은 먹을 활용한 추상미술을 제시했다. 서세옥(1929∼2020), 민경갑(1933∼2018), 송영방(1936∼2021) 등이 색채가 진한 일본화를 피한 수묵에 현대적이며 국제적인 감각의 추상을 결합한 ‘수묵 추상화’를 발표했다. 여러 단체를 설립하며 추상화의 흐름을 거세게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권영우는 어느 단체에도 소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실험을 시도했다. 시대적 과제에 동의하면서도 수묵 추상에는 동조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동양화의 필수요소인 묵을 배제한 채 종이만으로 완성한 작업을 선보였다. 흑색, 적색 혹은 황갈색 바탕 위에 손으로 찢거나 가위로 오린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화선지를 붙여 만든 작품이었다.


손톱으로 긁고 구멍 뚫기도…“신방 창호지 같아”

이때의 작업을 두고 권영우는 훗날 이렇게 회고하기도 했다. “동양화를 하려면 화판에 여러 겹 종이를 바르고 화선지를 입힌 뒤 몇 번 그리는데 물감이 배고 축축해지면 뜯어내고 다시 붙여야 하는 과정이 있다. 이 과정에 착안해 종이작업을 시작했다.” 동양화의 방법을 사용하면서도 결과물은 마치 서양식 콜라주와 같은 화면을 만든 것이다. 학부시절부터 동양화와 서양화를 구분하지 않던 그의 유연한 사고가 이러한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 밑바탕이 됐다.

이후 권영우는 종이를 활용해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종이작업’을 발전시켰다. 화선지를 찢기도 하고 손톱으로 긁어내거나 종이 뒤에서 손가락으로 압력을 가해 구멍을 뚫는 방법도 시도했다. 종이의 물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의 작업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장르의 회화였다. 이 작품을 ‘국전’에 발표했을 때 “신방을 엿보려고 창호지 문을 뚫어놓은 것 같다”는 평을 들으며 ‘한국성’이 도드라지기도 했다.

권영우는 그만의 종이작업으로 ‘국전’을 넘어 국외로도 활동 영역을 넓혔다. 1970년대 정부가 국내 예술가들의 해외 전시를 지원하던 흐름 속에서 그는 1972년 ‘제2회 인도 트리엔날레’와 1973년 ‘제12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고 같은 해 일본 동경화랑에서도 작품을 선보였다. 1974년에는 ‘국전’에서 초대작가상을 수상하며 파리로 나갈 기회를 얻었고 이듬해 파리에서 1년간 연수하며 화가로서 방향을 고민했다.


1976년 자크 마솔 화랑의 초대로 연 해외 첫 개인전은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 유명 일간지인 ‘르 피가로’는 그의 작품을 두고 “눈부신 백색과 음영 있는 부조로 빛과 심연이라는 이중의 감명을 불러일으켰다”는 호평을 내놨고, 이런 반응들에 힘입어 그는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하던 중앙대 교수직을 사임하고 1978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파리에서 11년간 머무르며 그는 있는 힘껏 도전하고 한계에도 부딪히며 작품세계를 확장해 나갔다. 예술의 메카로 여겨지던 파리에서의 활동 경험은 그에게 활력과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권영우의 ‘무제’(2002). 백자라는 모티프를 들여 정형화에서 벗어난 화면을 만들어냈다. 우연적인 변주에 기대 좀처럼 형상을 드러내지 않은 여느 작품과는 달리 백자라는 선명한 실체를 내보인 작가의 흔치 않은 작업이다. 한지로 모양을 만든, 반듯하지 않고 일그러진 백자들이 마치 어깨를 맞댄 듯 친근하게 겹쳐 있다. 백자가 품고 있는 압도적인 한국적 느낌 위에 겹침으로 미묘하게 변주한 흰색이 어우러져 깊이감을 가진 평면작품이 됐다. 패널에 한지, 130.5×162㎝.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권영우의 ‘무제’(2002). 백자라는 모티프를 들여 정형화에서 벗어난 화면을 만들어냈다. 우연적인 변주에 기대 좀처럼 형상을 드러내지 않은 여느 작품과는 달리 백자라는 선명한 실체를 내보인 작가의 흔치 않은 작업이다. 한지로 모양을 만든, 반듯하지 않고 일그러진 백자들이 마치 어깨를 맞댄 듯 친근하게 겹쳐 있다. 백자가 품고 있는 압도적인 한국적 느낌 위에 겹침으로 미묘하게 변주한 흰색이 어우러져 깊이감을 가진 평면작품이 됐다. 패널에 한지, 130.5×162㎝.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람은 늙어도 작업은 젊어야 한다”

1989년 귀국한 권영우는 경기도 용인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오직 작업에만 몰두했다. 이미 화단의 원로로 자리매김했지만 “사람은 늙어도 작업은 젊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끊임없이 새로운 방식을 시도했다. 시그니처가 된 종이를 뚫거나 긁는 방법 대신 붓으로 선을 올리고 이전과 달리 여러 색을 활용했다. 청바지나 빨랫줄 같은 일상의 사물 위에 종이를 붙여 부조와 같은 화면을 제작하기도 했다. 커다란 창이 있는 작업실에서 2013년 생을 마칠 때까지 종이의 물성을 탐구하며 다양한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권영우의 작품은 소란스럽지 않다. 조용하고 차분하다. 하지만 한국화라는 틀 자체를 깨버린 그의 작업은 그 어떤 작품보다 혁신적이다. 손에 쥔 붓을 과감히 내려놓은 용기, 유연한 사고, 그리고 묵묵한 실천. 이것이야말로 진짜 변혁의 조건이란 것을 그의 작품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해준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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