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현지시각)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구호 활동을 촉진할 의무가 있다는 결정을 내놓은 재판소 재판관들. EPA 연합뉴스 |
국제사법재판소(ICJ)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활동하는 유엔 구호단체의 하마스 연관설을 부인하고, 이 단체의 구호 활동에 이스라엘이 협조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놨다.
로이터와 에이피(AP)통신 등 보도를 보면, 국제사법재판소가 22일(현지시각) “이스라엘은 유엔과 유엔팔레스타인난민구호사업기구(UNRWA)를 포함한 유엔 산하 기관이 제공하는 구호 계획에 협조하고 이를 촉진할 의무가 있다”는 자문 의견(advisory opinion)을 내놨다. 이와사와 유지 재판소장 등 11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재판부는 “점령국으로서 이스라엘은 지역 주민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물자를 포함한 기본적인 필요를 보장할 의무가 있다”며 “민간인 기아를 전쟁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결론 내렸다. 재판소는 이 기본적 필요에는 식량과 물, 피난처, 연료, 의료 서비스가 포함된다고 덧붙였다.
이어 국제사법재판소는 이스라엘이 유엔팔레스타인난민구호사업기구의 일부 직원이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조직원이거나 관계되어 있다고 한 주장에 대해서도 “이스라엘이 그러한 주장을 입증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와 관련성을 들어 지난 1월부터 유엔팔레스타인난민구호사업기구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점령지인 동예루살렘 등에서 활동하는 것을 금지한 바 있다.
국제사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은 지난해 12월 유엔 총회가 자문 의견을 요청한데 따른 것이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이 결정은 여전히 비극적인 상황에 놓인 가자 주민들에게 필요한 수준의 지원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데 결정적”이라고 에이피통신에 밝혔다. 노르웨이와 슬로베니아 등도 결정을 환영한 가운데, 네덜란드 주재 팔레스타인 대사 아마르 히자지는 “명확하고, 단호한 결정으로 이스라엘에 유엔 기구를 금지할 구실도, 변명도 남지 않았다”고 밝혔다.
반면, 이스라엘 외무부는 엑스에서 “이스라엘은 국제법상 의무를 완전히 이행하고 있다. 테러 활동으로 오염된 조직과는 협력하지 않을 것”이라며 재판소의 결정을 거부했다. 미 국무부도 성명을 내 “또 다른 부패한 판결”이라고 비난했다.
이스라엘에 구호기관 협력 의무가 있다는 자문 의견 결정을 이끈 이와사와 유지 국제사법재판소 재판장. 로이터 연합뉴스 |
국제사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 대한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조사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톰 대넌바움 미국 스탠퍼드대 법학교수는 이번 결정을 두고 “네타냐후 기소 사건에 강력한 법적 증거를 제공한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국제형사재판소는 인도적 지원을 제한하고 민간인을 의도적으로 공격한 혐의로 네타냐후 총리 등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한 바 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사법재판소는 유엔의 최고 법률 기관으로, 재판소의 자문 의견은 법적·정치적 무게를 지니지만, 구속력은 없고 법원이 이를 강제할 수단도 없다.
유엔인구기금(UNFPA) 부총재인 앤드류 세이버튼은 이날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영양실조가 신생아에게 세대적인 영향을 미쳐, 전 생애에 걸쳐 장기 치료를 받아야 하는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고 밝혔다. 이달 들어 시작된 휴전으로 가자지구를 방문할 수 있게 된 그는 가자지구의 4분의 1이 기아를 겪고 있고, 신생아의 70%가 미숙아이거나 저체중 상태라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지난달 “가자지구로 전면적인 구호를 즉각 전달한다”는 내용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가자 평화구상에 합의했지만, 하마스가 인질 주검 송환을 지연시키고 있다며 구호 물자 반입을 제한하고 있다. 유엔식량계획(WFP)은 전날 가자지구에 반입되는 일일 구호물자의 양이 740톤으로 기본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한 최저선인 2000톤에 미치지 못한다고 밝힌 바 있다.
22일(현지시각)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관저에서 네타냐후 총리와 만난 제이디 밴스 미국 대통령. AP 연합뉴스 |
제이디 밴스 미국 부통령은 이날 네타냐후 총리를 면담하고,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23~25일 이스라엘을 방문할 예정이다. 미 국무부는 “루비오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의 가자지구 갈등 종식을 위한 포괄적인 계획의 성공적인 이행을 지원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방문한다”고 밝혔다. 스티브 윗코프 미 대통령 특사와 트럼프 맏사위 재러드 쿠슈너는 이날 아랍에미리트를 찾아 휴전 공고화 방안을 논의했다.
‘행동을 요구하는 유대인’은 유엔 사무총장 등 세계 지도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번 휴전이 점령과 아파르트헤이트(인종 차별 정책)의 종식으로 이어질 때까지 우리는 쉬지 않겠다”라며 국제재판소의 결정을 따를 것을 요구했다. 이어 이 모임은 “우리와 함께 평화와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더럽히기 위해 우리의 집단적 역사를 부당하게 이용하는 반유대주의라는 거짓 비난을 거부한다”며 이스라엘에 대한 국제법 준수 요구를 반유대주의라고 공격하는 비난도 차단했다. 서한에는 칸국제영화제와 아카데미에서 수상한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 이스라엘 지휘자 일란 볼코프, 에미상 수상 배우 일라나 글레이저와 해나 아인빈더 등이 참여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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