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출판사 부스에서 ‘케데헌’ 복장을 하고 즐거워하고 있는 관람객들. 출판사 제공 |
1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박람회장 중심부에 자리 잡은 출판사 아우프바우의 부스 한쪽 벽면엔 소설가 한강의 책이 가득했다.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희랍어 시간’과 그림책 ‘천둥 꼬마 선녀 번개 꼬마 선녀’ 독일어판도 눈길을 끌었다. 출판사 직원 말레네 두다(30)는 “독일 젊은 여성들 독자들이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무척 좋아하고 나 역시 한강의 여러 작품 중 이 소설을 가장 열광적으로 읽었다. 여성의 경험에 대한 파편화된 이야기가 주인공에게 꽂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라고 말했다.
이날 오전 10시 “세계 최고, 최대 도서전”인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이 드디어 일반 관람객에게 공개됐다. 어린이부터 휠체어를 탄 노인까지 수많은 인파가 전시장으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15일부터 이틀 동안 책의 판권을 매매하는 전문가 시장이 열렸다면, 이날부터 폐막일인 19일까지 사흘간은 독자의 시간이었다. 일반 관객 상당수가 각종 코스튬 분장을 했고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잔치를 즐겼다. 여기저기 출판 부스에서 작가들이 강연을 하고 사인을 했다. 서울국제도서전만큼 붐볐지만, 훨씬 더 다양한 성별과 연령, 인종, 그리고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행사가 끝나고 도서전 쪽은 전문가 11만8000명, 일반 관객 12만명이 도서전을 찾았다고 밝혔다. 전년도보다 출판 전문가 수가 3% 늘어난 수치였다.
출판사 아우프바우의 부스 한쪽 벽면에 소설가 한강의 책이 진열돼있었다. 이유진 기자 |
한지를 콘셉트로 아름다운 공간을 연출한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부스에는 눈 높은 책 도둑이 들었다. 한국 최고의 북 디자이너인 권준호, 함지은, 박금준이 표지를 디자인하고 고급 한지로 찍어낸 윤동주·이육사·한용운의 한정판 시집이 도난당했다. 광복 80돌을 맞아 특별 제작한 이 시집들은 한지라는 물성이 가진 고급스러움과 우아함을 극대화했다. 독일 언론에서 ‘아이티 박람회’라고 냉소적으로 말할 정도로 디지털 기술 연계를 자랑하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종이책’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낸 셈이다. 값진 책을 도둑맞는 건 참여 업체의 숙명이기도 했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에 진열된 시집들. 최고의 북 디자이너인 권준호, 함지은, 박금준이 표지를 디자인하고 고급 한지로 찍어낸 윤동주·이육사·한용운의 한정판 시집이다. 이유진 기자 |
예상대로 올해는 넷플릭스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의 영향력이 대단했고, 그 덕에 한국 전통문화에도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요리책과 사진책 등 한국 전통문화 영문판 서적을 들고나온 한림출판사 부스에는 미국 주류 언론에서 사진기자로 일하며 퓰리처상을 두번 수상한 강형원씨의 강연이 열렸다. 이 출판사는 ‘케데헌’의 ‘사자 보이스’의 갓과 도포 등 복장을 입어보는 체험도 마련했다. 임송희 상무는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가 많은 관심을 받아 기쁘고, 책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이어져서 보람이 크다”고 말했다.
청주고인쇄박물관의 ‘직지’ 체험은 많은 관심을 끌었다. 이유진 기자 |
청주고인쇄박물관은 세계기록유산 ‘직지’의 가치와 금속 활자의 우수성을 알린다는 취지로 커다란 키오스크 기계와 디지털 북을 한국에서 실어 왔다. 거대한 종이책에 표시된 버튼을 누르면 영상이 나오면서 ‘직지’ 속에 담긴 부처의 가르침을 설명한다. ‘케테헌’에 나오는 까치와 호랑이를 소재로 한 ‘작호도’를 직접 한지에 인쇄할 수 있는 체험 코너도 큰 인기를 끌었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는 대중 강연이 곳곳에서 열렸고 사람들이 밀려들어 발들일 틈이 없었다. 이유진 기자 |
이제 한국 출판인들은 굳이 ‘한국관’에만 머물지 않았다. 안그라픽스는 쟁쟁한 독일 출판사들이 모여 있는 중심부인 3.1관에 따로 부스를 차렸다. 직접 외국 바이어와 거래하려는 목적이다. 구민정 편집장은 “작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덕분에 한국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올해는 케데헌 덕에 여러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춘다. 이제는 좀 더 근원적인 한국의 서사, 디자인과 미술을 궁금해하는 분위기”라고 했다.
이탈리아 문학 에이전시 협회 공동 설립자 겸 회장인 가브리엘라 암브로시오니, 이탈리아 에이전트인 아델레 티엥고, 여행 유튜버이자 요가 수련자이기도 한 신아로미 작가. 이유진 기자 |
혼자서 용감하게 도서전의 문을 두드린 한국인들도 있었다. 여행 유튜버이자 요가 수련자이기도 한 30대 신아로미 작가는 전문가들만 입장할 수 있는 ‘문학 에이전트 및 스카우트 센터’에 들어가 직접 자기 작품을 설명했다. 500여개 테이블이 있는 이곳은 33개국에서 온 천여명의 에이전트와 바이어들이 목청을 높여가며 쉴 틈 없이 책을 거래하는 심장부였다. 이탈리아 문학 에이전시 협회 공동 설립자 겸 회장인 가브리엘라 암브로시오니는 “신경숙, 정유정 같은 한국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이탈리아에 많이 소개했지만, 도서전에 와서 이렇게 자기 작품을 직접 세일즈하는 작가는 결코 만난 적이 없다. 신 작가가 지닌 가능성이 크고 캐릭터도 밝아서 이탈리아 또래 여성 독자들도 아주 좋아할 것 같다”고 웃었다. 신 작가의 책 ‘혼자서도 잘 사는 걸 어떡합니까’(2024)는 신경숙, 김영하 등의 소설을 알리면서 세계에 문학 한류 열풍을 일으킨 미국 뉴욕의 유명 에이전트인 바바라 지트워의 눈에 들었다. 지트워는 이 책의 판권을 펭귄렌덤하우스에 팔았는데, 1억원대 선인세를 받고 계약을 성사시켜 또다시 파란을 예고했다. 신 작가는 “해외시장이 어떤지 직접 보려고 자비를 들여 이곳에 오게 됐다. 막상 와보니 큰 시장인 중국·미국·아랍 쪽에서도 나의 책에 관심을 갖고 있어서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홍보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신경다양성 인식개선 관련 연설을 하고 있는 ‘컬러풀브레인친구’ 차예진 대표. 컬러풀브레인친구 제공 |
자폐나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난독증, 틱 장애 같은 ‘신경다양성’의 특성을 귀여운 동물 캐릭터로 소개하는 ‘컬러풀브레인친구’ 차예진 대표는 혼자 부스를 차렸다. 차 대표는 이번 도서전을 계기로 신경다양성에 대한 영문판 도서를 출간하고 여러 나라의 출판사 관계자들과 관련 미팅을 진행했다. 15일엔 연사로 도서전 무대에 올라 신경다양성 인식 개선을 위한 연설을 했다. 그는 “모두가 다른 두뇌를 가지고 있으며, 그 다양성은 인류의 자연스러운 일부”라며 “신경다양성이 유럽,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다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행사의 가장 큰 이슈는 세계적 베스트셀러 ‘옐로페이스’의 저자 R.F. 쿠앙의 신간 4권에 대한 출간 계약을 하퍼콜린스가 체결한 것이었다. ‘예루살렘 전기’ ‘우편함 속 세계사’ 등을 낸 베스트셀러 역사가 사이먼 세바그 몬테피오레의 대서양 횡단 관련 책 계약도 화제를 모았다. 한편 영국 블룸즈버리에서 출간해 유럽권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의 백세희 작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세계 출판인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이탈리아 문학 에이전트인 아델레 티엥고는 “이탈리아에서도 백 작가의 책이 인기가 많았는데 너무 놀랍고 슬프고 안타깝다”고 말했다.
세계 최고의 도서전에서도 빈익빈 부익부는 뚜렷했다. 올해 대중의 큰 관심을 모은 1관에서는 갖가지 화려한 기술로 인쇄한 ‘영어덜트’ 분야 판타지 도서들이 전시돼 있었는데, 으리번쩍한 장식으로 대단한 위용을 자랑했다. 독일 언론 디 자이트,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자이퉁 같은 유명 언론사들은 유명 정치인들을 초대한 이야기 마당을 열고 할인된 가격으로 정기 구독자를 모으고 있었다. 동독 기반 좌파 신문사 ‘융에 벨트’는 직원들이 노란색 조끼를 입고 직접 신문을 나눠주면서 “독자들을 직접 만나기 위해 매년 도서전에 나온다”라고 말했다. 그들의 조끼에는 ‘그들은 인쇄한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거짓말을 하는지 인쇄한다’(Sie lügen wie gedruckt, wir drucken, wie sie lügen)고 적혀 있었다.
전통의 강자, 주어캄프 출판사는 대중들이 관심가질 만한 책들을 전진배치했다. 이유진 기자 |
한국에서도 두터운 팬층을 자랑하는 세계적 전통의 문학·학술 출판사 주어캄프는 이번 도서전에서 대중 출판사로서 방향과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듯했다. 권위와 자본력을 자랑하듯 부스는 거대했고, 책 디자인도 화려했다. 표지에 책 제목만 무뚝뚝하게 인쇄해 넣은 주어캄프의 학술서들은 현대적이고 화려한 책들에 밀려 양쪽 구석 진열대에 놓여 있었다. 도서전을 찾은 한국의 한 교수는 “학술쪽 서가의 규모보다 소설이나 대중서들을 전진 배치한 것이 뚜렷하게 보인다”고 말했다. 일반 독자 입장이 시작된 뒤 책 계산대 테이블엔 심리사회학자 에바 일루즈, 주디스 버틀러 등 유명 학자들의 원고를 포켓북 형태로 가볍게 만든 책을 전략적으로 진열했다. 주어캄프의 신사옥이 그려진 에코백도 18유로(약 2만9900원)에 팔고 있었다. 2009년 이 출판사는 사무실을 68혁명의 발원지인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으로 옮기며 큰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대형 출판사들이 독자들의 관심을 싹쓸이한 가운데, 독립출판사들은 낮은 비명을 질렀다. 독일 언론들은 “독립출판사가 병합되면서 도서전의 부스가 줄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2대째 독립출판사를 운영 중이라는 알리스 자우어는 “독립출판을 유지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우리도 다양한 언어로 직접 책을 제작하면서 외국에 판로를 개척하는 등 새로운 사업을 진행하면서 생존의 길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민음사, 창비, 문학동네 등 한국의 출판사들이 모여 있는 한국관. 이유진 기자 |
도서전 기간 동안 총 3500개 이상의 행사가 열렸고 곳곳에서 표현의 자유, 민주주의와 대중 운동에 대한 각오와 다짐이 이어졌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필리핀의 언론인 겸 작가 마리아 레사는 “우리는 ‘아마겟돈의 마지막 2분 전’에 서 있다. 그러나 희망은 있고, 그 희망은 행동에서 나온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더 나은 조건을 요구하고 커뮤니티를 조직하라”고 말해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하지만 상당수의 필리핀 출판인들은 친이스라엘 성향을 보이는 도서전을 보이코트했고, 행사장 바깥에는 또 다른 도서전이 열렸다. 행사장 맞은편 공터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해방 도서전’(Palestinian Liberatory Book Fair)에서 사람들은 반식민 투쟁의 서사를 기록하고 작가들의 낭독회를 함께 열었다. 2025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세계적인 도서 시장의 위용과 위기를 동시에 보여주는 행사였다. 유럽의 갈등과 저항의 가능성 또한 확인한 시간이었다.
프랑크푸르트/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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