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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반(反) 국전” 기치… 단색화 ‘묘법’의 대가 박서보

조선일보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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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2023년 10월 14일 92세
단색화 대가 박서보 별세. 2023년 10월 16일자.

단색화 대가 박서보 별세. 2023년 10월 16일자.


단색화 대가 박서보(1931~2023)는 별세 넉 달 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일기장 50여 권을 내보였다. 1972년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썼다고 했다. “평생 치열하게 살아온 나의 흔적이 담긴 보물”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문화면 ‘나의 현대사 보물’ 기획 중 하나인 이 기사는 박서보 생애 마지막 인터뷰가 됐다.

박서보의 일기는 한국 현대 미술사의 한 부분을 이룬다. 1972년 7월 28일의 기록. “1973년도 제8회 파리 비엔날레 공모전 접수. 오후 1시 30분경 이우환씨 서울 도착 예정. 해외 작가 포상 대상 추천. 이우환, 김환기, 백남준, 김창열, 이성자, 이응노씨를 추천하다”라고 적었다.

단색화 대가 박서보. 별세 넉 달 전  조선일보 '나의 현대사 보물' 시리즈 기사를 위해 인터뷰했다.

단색화 대가 박서보. 별세 넉 달 전 조선일보 '나의 현대사 보물' 시리즈 기사를 위해 인터뷰했다.


“한번은 내 작품이 옥션에 나왔는데, 옥션에서 진위를 가려 달라면서 작품 앞·뒷면 이미지를 보내왔어요. 작품 뒷면에 ‘○○○에게 선물로 이 그림을 준다. ○○○○년 ○월 ○일’이라고 쓰여 있는 겁니다. 글씨가 도무지 내가 쓴 것 같지 않아서 그 날짜 일기장을 찾아봤어요. ‘○○○와 술을 많이 먹었다. 기분이 좋아 작품을 선물로 주다’라고 쓰여 있더군요(웃음).”(2023년 6월 13일 자)

박서보는 홍익대를 졸업한 후 24세 때인 1956년 ‘반(反) 국전(國展)’을 선언하고 동료들과 4인전을 감행했다. 박서보는 훗날 “명패를 떼면 누구 것인지 알아볼 수 없을 그림들, 모든 것이 무너진 뒤에도 기성세대는 자기네 가치관을 고집하고 있었다”면서 “반 국전을 선언한 대가로 취직길이 끊겼다”(1998년 4월 9일 자)고 회고했다.

박서보 등의 이 4인전을 소개하는 기사가 조선일보 1956년 5월 16일 자에 실렸다.

“박서보 김영환 김충선 문우주 제씨(諸氏) 사인전(四人展)이 동방문화회관 화랑에서 개최되는데 동(同) 사씨(四氏)는 모두 홍대 미술학부 졸업생들로서 이 신진 화가들에 대한 기대가 크다.”(1956년 5월 16일 자 석간 4면)


1962년 3월 2일자. 박서보의 '원죄' 국제화단에서 격찬.

1962년 3월 2일자. 박서보의 '원죄' 국제화단에서 격찬.


박서보는 국제 화단에서 먼저 주목받았다. 1961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 청년 화가 파리 대회에 작품 ‘원죄’를 출품해 1위 상을 받았다.

“이 젊은 신인 화가는 머리를 깎고 파리에 건너가 그곳 화단의 주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1961년에 개최된 세계 청년 화가 파리 대회의 합동전에서 출품하여 제1위상을 받은 재질 있고 역량 있는 신인인 것이다.”(1962년 3월 2일 자 석간 4면)

시인 장석주는 이때 박서보의 일을 자세히 서술했다.


“(박서보는) 파리에서 자주 끼니를 거르며 1년을 버텼다. 호텔 숙박비가 없어 야반도주했다. 새로 구한 하숙집 주인은 하숙비가 밀렸다고 전기를 끊었다. 그 뒤 기적이 일어났다. 박서보의 ‘원죄’가 콘퍼런스 추상 분야에서 일등상을 거머쥐었다. 거금 8000달러가 상금이었다. 하숙비와 지인들에게 빌린 돈을 갚았다. 몇 달 치 하숙비를 한목에 받은 하숙집 할머니는 슬그머니 와인 한 병을 방문 앞에 두고 갔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 온 청년 화가는 그때까지 와인을 마실 줄 몰랐다.”(2019년 7월 25일 자 A39면)

고집스럽게 '묘법' 추구하는 박서보. 1981년 11월 4일자.

고집스럽게 '묘법' 추구하는 박서보. 1981년 11월 4일자.


박서보를 특징 짓는 단색화 ‘묘법’ 시리즈는 1970년부터 시작했다. ‘새로운 형태의 작업’으로 주목받았다.

“박서보 개인전이 2~10일 명동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대형의 캔버스를 팽팽하게 만들고 그 위에 흰색 계통의 바탕칠을 7~8회 계속한 다음 캔버스가 북처럼 팽팽해졌을 때 연필로 무수하게 많은 선을 긋는 묘법(描法)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작품을 출품하였다.”(1973년 10월 7일자 5면)


박서보는 ‘묘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림을 그린다기보다 옛 선비들이 난초를 치듯, 또는 글씨를 쓰듯 그렇게 운필(運筆)을 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들이 난초를 치는 행위로 자신을 해방하듯, 그렇게 나 자신을 해체하고 가장 순수한 자연을 회복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1981년 11월 4일 자 7면)

50년 이상 단색화 작업에 매진했지만 작품이 본격적으로 팔리기 시작한 때는 80세 이후였다. 1976년 작 ‘묘법 No. 37-75-76’이 2018년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200만달러(약 25억원)에 팔렸다. 세계에서 한국 미술의 위상이 높아진 때문이기도 했다. 박서보는 말했다. “우리는 늘 있었어요. 이제야 세계가 한국의 미술 수준을 알아본 거죠.”(2023년 6월 13일 자)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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