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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장소, 그 소녀 되어… 외면받은 목소리 불러낸다

조선일보 황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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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간단후쿠’ 펴낸 김숨 작가
신작 장편 '간단후쿠'를 펴낸 소설가 김숨. /장경식 기자

신작 장편 '간단후쿠'를 펴낸 소설가 김숨. /장경식 기자


소설가 김숨(51)은 지난 10년간 자꾸 뒤를 돌아봤다. 2016년 소설 ‘한 명’을 시작으로 일본군 ‘위안부’ 관련 소설을 꾸준히 썼다. 그러나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끝맺지 못한 소설을 내놓은 것 같은 아쉬움”이 남았다. 올해 비로소 마침표를 찍었다. 신작 ‘간단후쿠’(민음사)는 자기 갱신을 거듭하는 김숨의 새 정점이라 할 만하다.

최근 서울 조선일보사에서 만난 김숨은 “넘어야 할 산을 넘었다”고 했다. 2005년 첫 소설집을 펴내고 해마다 1~2편의 작품을 발표하는 다작가다. 2020년 ‘떠도는 땅’으로 본지 주관 동인문학상을 받았고, 대산문학상·이상문학상·현대문학상 등 국내 주요 문학상을 이미 석권했다. 책은 ‘전쟁 문학’ 혹은 ‘증언 문학’으로 세계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 아프지만 아름답다. 윤리적이면서 미학적이다. 소설가도 “쓰고 싶은 소설을 쓴 것 같다”고 했다. 집필 기간은 6개월 남짓이지만 “10년 전부터 이미 쓰고 있던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국내 출간과 동시에 폴란드 주요 출판사(차르나 오브차)와 수출 계약을 맺었다.

‘간단후쿠’는 일본군 위안부들이 입던 ‘간단한 옷’. 빳빳한 광목 천으로 만든 원피스다. 소설은 일제강점기 만주의 한 위안소 ‘스즈랑’이 배경이다. 그곳에 사는 열 명의 여자애들이 주인공이다. ‘간단후쿠를 입고, 나는 간단후쿠가 된다. 아니다. 내가 간단후쿠를 입는 것이 아니라 간단후쿠가 나를 입는 것이다.’ 도입부가 소설의 정경(情景)을 한눈에 그린다. 여백이 많은 단문은 때론 시, 어느 땐 노래 같다. 김숨은 “첫 문장과 함께 형식이 저절로 오는 편”이라며 “매일 밤 조각나는 소녀의 몸, 조각나는 영혼, 조각나는 기억. 기형적으로 재배치되는 몸과 영혼과 기억. 그것에 대해 쓰려다 보니 시적인 형식이 내게로 왔다”고 했다.

피해자의 증언을 녹인 소설이 미학적일 때 이는 윤리적인가. 김숨은 “거칠게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며 “표현은 정제하되 오히려 아름답게, 고운 옷을 입혀 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장경식 기자

피해자의 증언을 녹인 소설이 미학적일 때 이는 윤리적인가. 김숨은 “거칠게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며 “표현은 정제하되 오히려 아름답게, 고운 옷을 입혀 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장경식 기자


어떤 아픔은 담백하게 쓰였을 때 가장 아리다. 구체적인 묘사는 오히려 폭력이 된다. 출판사에 넘긴 초고에서 100매를 더 덜어냈다. 그는 “소녀의 몸에서 벌어지는 적나라하고 날 것인 악몽에 대해 써야만 했다”며 “더없이 정제되고, 절제되고, 차가워야 했다”고 전했다. 김숨은 조심스레 독자에게 간단후쿠를 입히고, 만주 들판으로 끌고 간다. 우리는 얼떨결에 간단후쿠가 된다. 스즈랑의 여자애들처럼 막사발에 담긴 귀리죽을 떠먹고, 다다미 한 장짜리 방에 눕는다. 숨죽인 채 다음 문장을 읽는다. ‘돌림노래는 스즈랑 여자애들의 몸을 악기 삼아 불린다. (…) 돌림노래가 불리는 내내 아래는 돌림노래와 함께 돌고, 돌고, 돈다.’ 참담한 리듬이 읽는 이를 무너뜨린다. 망연자실하게 된다.

달라진 건 체화의 정도다. 김숨은 “그동안 위안소 안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겉돌았는데, 이번엔 공간과 소녀들 한 명 한 명이 그려졌다”며 “그 장소, 그 시간 소녀의 몸 안으로 들어가서 쓸 수 있었다”고 했다. 누적된 시간과 꾸준한 작업이 이를 가능케 했다. 장편 ‘한 명’ ‘흐르는 편지’ 외에도 2018년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등 길원옥·김복동 할머니의 증언을 소설로 썼다. 2021년에 펴낸 중편 ‘듣기 시간’은 피해자의 증언을 듣는 기록자의 고민을 담았다.

일본군 위안부에서 시작된 작업은 일제강점기 ‘뿌리 뽑힌 사람들’에 대한 관심으로 뻗어나갔다. 극동 러시아의 조선인 강제 이주사를 다룬 ‘떠도는 땅’(2020), 해방 직후 부산을 배경으로 떠도는 이들을 포착한 ‘잃어버린 사람’(2023), 태평양전쟁 당시 오키나와 구메지마섬 학살 사건에 대해 쓴 ‘오키나와 스파이’(2024) 등. 소설가는 지난 10년을 “듣기란 무엇인가 질문하게 되었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통찰하게 해준 시간”이라고 했다.


김숨은 "뭘 써야겠다 계획하진 않지만 쓰고 싶은 게 온다"며 "그 소설이 또 다음 소설을 데리고 온다"고 했다. /장경식 기자

김숨은 "뭘 써야겠다 계획하진 않지만 쓰고 싶은 게 온다"며 "그 소설이 또 다음 소설을 데리고 온다"고 했다. /장경식 기자


이날 인터뷰 중 김숨은 “그렇게 돼요” “쓰게 돼요” “저절로 와요” 같은 답을 자주 했다. 논리적인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영역이 있었다. 쓰는 행위가 일으키는 작용에 몸을 맡기고 있어서인 듯했다. “소설을 쓸 때 그런 느낌을 받아요. 나뭇잎처럼 흐르는 물에 실려서 그냥 가고 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마치 계획한 것처럼 흐름이 만들어져 있어요.” 의무감도, 사명감도, 책임감도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쓰는 작업을 통해 가닿고자 한 어떤 지점. 김숨은 그곳에 있다.

[황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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