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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임무는 완수” 볼리비아서 잡혀 총살… 신화가 된 체 게바라

조선일보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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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1967년 10월 9일 39세
체 게바라

체 게바라


‘큐바 내전 절정(絶頂)에’.

1958년 12월 31일 자 조선일보는 1면 중간에 쿠바 지도와 반란군 사진을 함께 싣고 비중 있게 ‘쿠바 내전’ 상황을 전했다. 수도 아바나 동쪽 도시 산타클라라에서 격전이 벌어졌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는 “일(一) 미확인 보도는 카스트로 부관인 좌익계 아르젠틴(아르헨티나)인 ‘오이네스토 게바라’가 이 전투에서 살해되었다고 말하였다”고 전했다.

쿠바 내란 절정에. 1958년 12월 31일자.

쿠바 내란 절정에. 1958년 12월 31일자.


보도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게바라는 살아있었다.

1940~44년에 이어 쿠데타로 1952년부터 집권 중인 풀헨시오 바티스타 대통령은 1959년 1월 1일 사임을 발표하고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도주했다.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반군은 3일 수도 아바나에 입성했다.

체 게바라(1928~1967)는 쿠바 혁명 후 외국 대사로 파견되어 외교 활동을 펼쳤다. 이집트 나세르, 인도 네루,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북한 김일성 등을 만났다.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


1961년 쿠바 중앙은행 총재에 이어 산업부 장관을 맡아 주요 산업 수단을 국가가 통제하는 계획 경제 정책을 추진했다.


“큐바 산업상(産業相) E·게바라는 30일 큐바를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본궤도에 올려놓기 위한 광범한 산업 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는 큐바의 중산계급은 국외로 도피하여 카스트로 수상 정권에 모반한 후 침략자로서 돌아왔기 때문에 사기업체를 소유할 권리를 박탈당하였으며 큐바는 주요 산업 수단을 국가에서 통제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1961년 5월 2일 자 조간 2면)

카스트로와 밀월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소련과의 관계에서 카스트로와 갈등을 빚었다. 체 게바라는 1965년 1월 알제리에서 소련을 향해 “어떤 사회주의 국가는 제국주의 국가처럼 착취한다”고 비난 연설을 하고 쿠바를 떠났다. 소련은 앞서 1962년 쿠바에 경제 원조를 대가로 핵미사일 기지를 설치했다.

볼리비아 산중에 나타난 체 게바라. 1967년 9월 24일자.

볼리비아 산중에 나타난 체 게바라. 1967년 9월 24일자.


카스트로는 1965년 10월 “게바라가 다른 곳에서 혁명을 수행하려고 떠났다”고 발표했다.


“쿠바 수상 피델 카스트로는 3일 밤 아바나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쿠바 공산 지도층 제3자의 자리에서 의심쩍게 사라졌던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다른 곳에서 혁명을 수행’하려고 쿠바를 떠났다고 말했다. 게바라가 포함되지 않은 새로 구성된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소개하는 예식에서 박수 갈채를 받으며 카스트로는 지난 4월 1일 게바라한테서 받았다는 서한을 낭독하였다. 게바라는 카스트로에게 보낸 서한에서 쿠바에서의 자기 임무는 완수했다고 보기 때문에 맡은 직책에서 사임하는 것이며 세계의 다른 여러 나라들이 자기의 신중성 있는 노력을 요청하고 있다고 말했다.”(1965년 10월5일 자 조간 2면)

게바라는 이후 행방이 묘연했으나 1967년 9월 볼리비아 산중에서 촬영된 사진이 보도되었다.(1967년 9월 24일 자 2면) 그는 앞서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에서 게릴라전을 통해 혁명을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남미 볼리비아에 잠입해 게릴라로 활동했다.

체 게바라 죽음에 의문. 1967년 10월 15일자.

체 게바라 죽음에 의문. 1967년 10월 15일자.


게바라는 1967년 10월 8일 볼리비아 정부군에 총상을 입고 생포됐다. 이튿날 사망했다는 볼리비아 정부 발표가 있었다. 볼리비아 정부군이 총살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미국 CIA 개입설도 나왔다. 가짜 시체설(說)도 유포됐다. 볼리비아 정부는 10일 “게바라가 정말 죽었다”고 발표하고 시신을 공개했다.


“볼리비아 당국은 게바라는 잡혔을때 심한 부상을 해서 이튿날(9일) 아침에 죽었다고 발표했었다. 이런 경위로 보면 게바라는 틀림없이 체포되어 군(軍) 당국에 의해 총살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낳게 하고 있다. (중략) 한 쿠바인 망명자는 “게바라의 죽음은 볼리비아 정부와 미 CIA에서 조작한 냄새가 짙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게바라는 죽어서도 신화(神話)를 남기는 셈인가.”(1967년 10월 15일 자 4면)

체 게바라는 기사의 예견대로 세계를 비롯해 한국에서도 ‘신화’가 되었다. 그의 평전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베레모를 쓴 초상화는 티셔츠 패션이 됐다. 그는 반(反)자본주의 투쟁에 목숨을 바쳤는데 역설적이게도 상업적으로 이용됐다. 명품 시계 모델이 되고, 할리우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게바라가 바란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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