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글거리는 소리와 고소한 냄새, 막 부쳐 낸 전의 맛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 아는 맛이 더 무섭다. 하지만 누군가는 기름 앞에서 전쟁을 치러야 한다. 재료 손질하고, 간하고, 밀가루·달걀옷을 입혀 지지고 뒤집고…. 전처럼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 또 있을까.
36년 간 원당시장에서 전을 부쳐오고 있는 '신원당식품'의 전. "멀리서 찾아오는 단골도 많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가장 인기가 많다는 동그랑땡.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삼색전은 만드는 데 손이 많이 간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우리나라에서 전을 언제 처음 부쳐 먹기 시작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고려 시대 기록에 전 부치는 것과 유사한 조리법이 등장한다. 조선 시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전의 종류와 조리법이 다양해졌다. 육전·생선전·채소전 등 계절과 용도에 맞춰 다양한 전이 나왔다. 조선 시대 조리서인 ‘시의전서(是議全書)’에는 전이 제수(祭需)로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대략 그때쯤부터가 아니었을까. 전국의 딸과 며느리들에게 전이 애증이 서린 음식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추석을 일주일 앞둔 시점이지만 전 찾는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
대형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 가는 동그랑땡과 깻잎전.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
왼쪽은 장당 6000원인 녹두전, 오른쪽은 동그랑땡. 돼지고기가 많이 들어가 한 입 베어물자 육즙이 촤르르 퍼졌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
오늘날 주부들이 겪는 ‘명절 증후군’의 주범은 음식 준비다. 명절 때 스트레스받는 게 무엇인지 묻는 한 설문조사에서 ‘차례상 차리기’가 60%로 가장 많이 꼽혔다. 그 차례상 준비 중에서도 전 부치기가 1순위다. 예전에 비하면 가게에서 전을 사는 비율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전 부칠 생각에 명절 전부터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많다. 얼마나 힘들기에. 추석을 일주일 앞둔 지난달 29일 경기도 고양시 원당시장을 찾아 36년간 장사를 해 온 전집에서 6시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전을 부쳤다. 처음 부쳐보는 전이다.
조유미 기자(왼쪽)가 '전 부치기 달인' 조용순(65)씨와 함께 전을 부치고 있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
'신원당식품'에서 파는 전의 종류는 동태전·호박전·삼색전 등 10가지. 평소 전을 부치는 데 쓰는 밀가루 양은 하루 약 10㎏이지만 명절 때는 훌쩍 늘어난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
◇막 뒤집지 마라… 중요한 건 모양
“동태전부터 할 거예요?” “응, 동태 해~.”
오전 9시, 전 전문점인 ‘신원당식품’ 사장 조용순(65)씨가 앞치마를 두르고 불판 앞에 섰다. 가로 120㎝·세로 60㎝ 대형 불판이다. 이 집에서 만든 전을 먹겠다고 서울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단골도 많다. 조씨가 달궈진 철판 위에 옥수수기름을 두르자 기름방울이 잘게 튀며 치익 소리가 났다. 계란물 곱게 차려입은 동태전이 하나둘 불판 위에 얹힌다. 기름과 튀김옷이 자글자글 끓어오르며 고소한 냄새가 시장 골목을 채우기 시작했다.
추석을 앞둔 시장 전집은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했다. 이 집에서 파는 전의 종류는 동태전·호박전·삼색전 등 10가지. 평소 전을 부치는 데 쓰는 밀가루 양은 하루 약 10㎏이지만 명절 때는 훌쩍 늘어난다. 이 전집은 추석 당일을 포함해 앞뒤로 사흘도 문을 여는데 이 기간 쓸 밀가루를 20㎏짜리 여섯 포대 준비했다고 한다. 계란은 6000여 개. 재료 준비와 전 부치기를 위해 2~3주 전부터 ‘알바생’을 쓴다. 나도 그중 한 명이다.
경기도 고양시 원당시장 '신원당식품'에서 36년 간 전을 부쳐오고 있는 '전의 달인' 조용순씨.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
가장 손이 많이 가는 건 삼색전.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
동그랑땡이 자글자글~. 조용순씨는 "뒤집개로 눌러 봤을 때 탱탱하게 올라오면 익은 것"이라고 했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
뒤집개를 들고 조씨 옆에 섰다. 눈앞의 대형 불판에는 전이 한 번에 20~30장씩 올라갔다. 불판에서 전 하나를 노릇하게 부치는 시간은 평균 2분 내외. 화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가정용 가스레인지로는 3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고루 익히기 위해 그 사이 네댓 번씩은 뒤집어야 한다. 집에서 한 번에 전을 5장 올려 부친다면 1시간 동안 약 100장, 총 400~500번 전을 뒤집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양도 양이지만, 모양이 중요하다. 막 뒤집어서는 안 된다. 거뭇하게 탄 부분 없이 고루 노릇하고 끝이 둥그스름하며 계란옷이 벗겨지지 않게 부쳐야 한다. 동태전 하나를 뒤집었다. 아뿔싸, 계란물이 벗겨져 생선살이 훤하다. 튀김옷이 덜 익었나 싶어 시간을 두고 뒤집었더니 이번엔 가운데가 거무스름했다. 계란물로 이어진 전은 ‘적당한 때에’ 뒤집개로 갈라 모양을 잡아야 했다. 계란이 너무 익은 뒤 가르면 가장자리가 빼죽해졌다.
계란물로 이어진 전은 ‘적당한 때에’ 뒤집개로 갈라 모양을 잡아야 했다. 계란이 너무 익은 뒤 가르면 가장자리가 빼죽해졌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
◇어르신도 “며느리 힘들다”며 사가
명절 연휴를 일주일 남긴 시점인데도 전 찾는 사람이 밀려들었다. 과거에는 추석 당일이나 전날 특히 붐볐지만 최근에는 연휴 시작 3~4일 전부터 손님 발길이 이어진다고 한다. 결혼 14년 차인 조씨의 며느리 서유진(42)씨는 “젊은 사람, 어르신 할 것 없이 미리 차례 지내고 여행을 가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차례 안 지내는 집도 ‘여행 갈 때는 가더라도 명절인데 전은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사 간다”고 했다.
“냉동했다가 부치면 되죠?”
머리가 희끗한 60대 여성이 전을 수북이 골라 담으며 말했다. 녹두전은 장당 6000원, 다른 전은 400g당 1만2000원. 손님 중에는 60~70대가 많았다. 계산대 앞에서 무게를 달던 서씨는 “내가 시집올 때만 해도 어르신들은 ‘전은 직접 부쳐야 한다’면서 전을 사 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간간이 사러 오는 분들도 ‘전을 어떻게 얼리느냐’며 연휴 당일 아침에 왔다”며 “그런데 최근 몇 년 새 ‘자식들이 고생한다’면서 간단하게 차례만 지낼 수 있도록 미리 전을 사는 어르신이 늘었다”고 말했다.
손이 많이 가도 너~무 많이 간다. 조유미 기자가 전에 밀가루를 묻히고 있다. 고추전을 만들기 위해선 고추 속을 갈라 뒤집어 씨를 빼내고 속을 채워야 한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
사회가 변하면서 전집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1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전 찾는 손님은 부쩍 늘었다. 지난달 28일 농촌진흥청의 ‘명절 농식품 구매 행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차례를 지내는 응답자의 69.9%가 “차례 음식을 전부 사거나 일부 구매해 준비할 예정”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사 가는 양은 줄었다. 이전에는 대가족이 먹을 몫을 준비해야 했기에 한 번에 사 가는 양이 많았다. 지금은 핵가족화로 전을 한두 접시씩 적게 사 간다고 한다. 또 차례 준비도 이전보다 간소화되는 추세다.
이번엔 깻잎전 속 넣기. 깻잎전 속이 담긴 바구니 하나의 무게만 8.3kg이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
깻잎 크기와 무관하게 속의 양을 일정하게 쥐어 넣는 것이 핵심.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
◇목·허리·손목·무릎 다 아파
부쳐도, 부쳐도 끝이 없다. 전 부치기 3시간째. 동태전 10㎏에 이어 호박전·삼색전 각각 8㎏씩을 거쳐 고추전까지 왔다. 담아내기 무섭게 팔려 나가니 끊임없이 부쳐야 했다. 전마다 잘 부치는 법이 달랐다. “호박전은 너무 익히면 흐물흐물해져서 못 쓴다” “고추전은 속까지 두루 익도록 둘둘 돌려 익혀야 한다”…. “앗, 뜨거워!” 여러 장을 한 번에 뒤집으려다 요령이 없어 철벅거리며 뜨거운 기름이 튀었다.
목과 허리가 아파온다. 뒤집기에 집중하느라 철판 위로 몸을 자꾸 기울인 탓이다. 서 있느라 오래 굽히지 못한 무릎은 저릿저릿. 화기에 얼굴이 붉어진 지 오래다. 무엇보다 손목을 돌리면 끊임없이 우두둑 소리가 났다. 일반 가정에서는 보통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전을 부친다. 한 의료 기관이 주부 3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명절에 일한 뒤 81%가 관절이나 허리 통증을 겪었다고 답했다. 통증의 원인으로는 ‘전 부치기’가 52%로 가장 많았다. 쪼그려 앉을 경우 무릎 관절과 허리에 가해지는 압력이 각각 체중의 5배, 2~3배라고 한다. 그렇다고 서서 전 부치는 게 쉽다는 얘기는 아니다. 왜 전 부치기가 명절 스트레스 주범인지 실감하는 중이었다.
조씨의 사촌 유용화(74)씨가 전을 앞에 두고 웃고 있다. 유씨는 이 자리에 시장이 들어서기 전부터 족발집, 양말 장사 등을 하다가 전집으로 업종을 바꾼 '원조 원당시장 전집 할머니'.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
전화 주문을 받던 조씨의 사촌 유용화(74)씨가 “처음 하면 골병 난다”며 “좀 앉으라”고 했다. 이번에는 야채·두부 등을 으깬 깻잎전 속을 넣기로 했다. 3~4년 전부터 명절 무렵 반짝 일을 돕는 ‘알바생’ 50대 고모씨와 마주 앉았다. 시급은 1만5000원. 10시간가량 이어지는 만큼 젊은 알바생은 한 번 왔다가 금방 관둔다고 한다.
깻잎 크기와 무관하게 속의 양을 일정하게 쥐는 것이 중요했다. ‘예쁜 모양’을 위해 속을 넣은 뒤 가위로 톱니 모양 잎을 둥글게 잘라낸다. 부치는 건 차라리 쉬웠다. 수작업으로 할 밑준비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특히 손이 많이 가는 건 삼색전이었다. 햄·단무지·맛살 등을 순서에 맞춰 가지런히 자른 뒤 이쑤시개에 꽂아 준비해야 한다. 고추는 일일이 가르고 뒤집어 씨앗을 빼낸 뒤 속을 채운다. 그 속은 누가 준비하고 계란물은 또 누가 풀어서 섞나. 동그랑땡은 어떻고. 이 가게에서는 돼지고기 50㎏과 두부 10판 등을 반죽 기계에 넣어 준비하지만, 가정집에서 하려면 두부를 손수 으깨야 한다.
점심은 배달 순댓국밥에 백반. 자리 비울 새도 없어 돌아가며 재빨리 식사한다. 다시 동태전·호박전·삼색전 등 반복. 오후 3시쯤, 6시간의 ‘전집 알바’가 끝났다. 부모님께 드릴 생각으로 내가 부친 전 1㎏쯤을 사 들고 집으로 향하기 전, 조씨에게 “명절에 전 부치다가 싸우는 집 많대요”라고 말했다. 그는 “해 보니 고생이지?”라면서 “그래도 명절에 전이 없으면 명절 분위기가 안 날 것”이라고 했다.
차례는 조상을 기리면서 후손들이 친목을 다진다는 의미가 있다. 차례상 준비하면서 가정불화가 생기는 것을 조상이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전 부치기는 명절 스트레스의 상징처럼 됐지만 본래 명절 풍경의 한 조각이다. 번거로움을 줄여가면서도 그 의미를 지켜내는 방법을 찾는 것.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과제일지 모른다. 전은 세대와 가족을 붙여주는 음식이니까.
6시간 동안 전을 부치고 지친 조유미 기자.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
[조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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