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종말 이후의 모습을 유기·무기물 복합체로 표현한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의 대형 설치작 '상상의 종말 Ⅲ'(2022년). |
지난 30년간 미술 전시로 관객을 맞았던 공간이 폐허로 변했다. 미술관 입구는 흙더미로 가로막혔고 전시장을 환히 밝히던 조명도, 미술품 보존을 위해 상시 가동되던 온습도 제어장치도 꺼졌다. 화이트 큐브를 이루던 흰 가벽의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건 가려져 있던 건물의 낡은 콘크리트와 앙상한 철골 구조. 벽에 새겨져 있던 전시 서문의 글자들은 도무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워지거나 해체됐고, 강당의 좌석도 먼지 쌓인 비닐로 덮였다.
퀴퀴한 냄새와 습한 공기에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이곳은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가 미술관을 무대로 인류 멸망 이후의 모습을 시각화한 것이다. 인간이 자취를 감춘 어두컴컴한 공간에는 인류 출현 이전의 원시적 지구를 떠올리게 하는 흙과 식물이 야생적으로 흩어져 있는가 하면, 언젠가 인간이 사용하다 버린 듯한 기괴한 형태의 기계들이 움직임을 멈춘 채 얽히고설켜 있다. 건물 크기의 대규모 설치를 통해 비야르 로하스가 하고자 한 이야기는 인류가 왜 멸망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시작된다.
비야르 로하스의 한국 첫 개인전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가 서울 종로구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내년 2월 1일까지 열린다. 전시장과 복도, 계단, 화장실, 극장 등 아트선재센터의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전관에서 펼쳐지는 이번 전시는 1995년 미술관 옛터에서 처음 열린 전시 '싹'의 30주년을 맞아 기획됐다. 작가는 미술관 건물을 해체하고 인류가 직면한 위기를 상징하는 수많은 조각이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를 이루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인위적인 공간과 지구 생태 사이의 경계를 허물면서 우리가 다가올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해야 할지 질문을 던진다.
미술관 주 출입구를 가로막고 전시된 '상상의 종말 Ⅲ'(2024년). |
비야르 로하스는 인류가 직면한 현재와 미래의 위기 속에서 다양한 생명체와 그들이 맺는 복잡한 관계를 탐구해왔다. 전시 제목 '적군의 언어'와 관련해 비야르 로하스는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는 상징체계를 홀로 발명한 존재가 아니다. 약 2만년 전부터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등 다른 인류와 함께 진화했고 그들과의 만남은 적대적이면서도 친밀하고, 경쟁적이면서도 협력적이었다"며 "그 과정에서 오간 것은 도구, 몸짓, 불만이 아니라 상징적 사고와 의미 창조의 첫 불씨였다. 전시 제목은 바로 이러한 역설을 담고 있다"고 밝혔다.
'적'이라는 완전한 타자성은 낯설고 위협적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한 거울이기도 했다는 설명이다. 그는 "적이라는 것을 우리가 절대 완전히 배제할 수 없고, 독립적인 존재로서는 의미를 만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비야르 로하스가 생각한 오늘날 인류의 적은 포스트휴먼 시대를 이끌 인공지능(AI)이다. 그는 "우리는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를 가진 새로운 타자 AI와 마주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그들과 공존하고 있고, 그들에게 지식을 전송하고 있다"며 "그러나 동시에, 어쩌면 그러한 행위가 우리 스스로 소멸을 준비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예감 또한 피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관객은 폐쇄된 미술관 정면 출입구 아래 우회 경로를 통해 전시장 1층과 2층에 들어서면 비야르 로하스가 2022년부터 이어온 '상상의 종말' 연작을 마주하게 된다. 작가가 직접 개발한 '타임 엔진'을 기반으로 한 작업 시리즈로, 타임 엔진은 비디오 게임 엔진과 AI, 가상세계를 결합한 일종의 디지털 시뮬레이션 도구다. 비야르 로하스는 변화하는 생명체와 건축, 생태계, 사회·정치적 조건이 뒤섞인 세계를 디지털 공간에 구축한 뒤 가상공간에서 생성된 조각들을 모델로 삼아 현실세계에 이를 물리적 형태로 정교하게 구현한다. 이 조각들은 인간과 기계의 노동을 상징하는 금속과 콘크리트, 플라스틱, 흙, 유리, 수지, 소금, 나무껍질, 자동차 부품 등 유기적·무기적 재료가 층층이 쌓인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위기를 암시하듯 붉은빛을 내는 기계의 모습. |
비야르 로하스는 타임 엔진을 통한 작업에 대해 "지구가 새와 나무, 바위, 기계를 만들어내듯 타임 엔진으로 구축한 디지털 생태계 역시 자율적으로 물질을 생성한다. 이는 창작 행위에 대한 근본적 존재론을 전복하는 방식이다. 인간이 세계에 형식을 부여하는 게 아니라 세계가 스스로 작용해 현실을 만들고, 그 현실이 다시 물질을 창조해낸다. 나는 그렇게 생성된 물질들을 우리가 공유하는 현실로 옮겨온다. 즉 나는 세계를 모델링하고, 그 세계는 나를 위해 조각을 모델링하는 것"이라고 했다.
흙더미 위에 놓인 '상상의 종말 Ⅳ'(2024)는 드럼세탁기를 천장에서 내려온 해괴한 괴물 기계가 집어삼키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SF 영화를 연상시키는 이 장면은 나뭇가지와 로봇 팔 등 유기물과 무기물이 뒤엉킨 형태로 완성됐다. 인간의 일상(세탁기)이 자연(나무)과 기계(로봇) 모두에 잠식당한 듯하다. 2층에 전시된 '상상의 종말 III'(2022)는 776×448×522㎝의 압도적 크기로 시선을 압도한다. 뿌리까지 드러낸 나무가 천장에서부터 뻗어져 내려오고, 여러 재료가 뒤섞여 만들어진 복합체는 인간인 관객을 위에서 내려다본다. 이처럼 '상상의 종말' 시리즈는 상상하는 존재인 우리 자신의 종말 위기를 간접 체험하게 한다.
폐허로 변한 전시장 벽면의 전시 서문 글자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돼 있다. 아트선재센터 |
한편 이번 전시는 비야르 로하스가 리얼 DMZ 프로젝트(2014년~), 제5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2016년), 광주비엔날레(2018·2021년)에 이어 한국에서 진행한 장기 프로젝트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전시를 위해 작가 스튜디오의 멤버 11명이 6주간 미술관 현장에서 작품을 설치하고 연출했다.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관장은 "이번 전시는 붕괴와 진화, 재생의 순환 속에 놓인 세계로 관객을 초대한다"며 "이곳에서 촉발된 미지의 감각과 사유를 통해 우리가 현실로 받아들이는 세계의 구조를 낯선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게 한다"고 밝혔다.
아르헨티나 로사리오 태생의 비야르 로하스는 집단적이고 협업적인 과정을 통해 대규모의 장소 특정적 설치 작업을 하는 작가다. 조각, 드로잉, 영상, 문학, 행위를 넘나들며 멸종 위기에 처했거나 이미 멸종한 인류의 조건을 탐색하는 한편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섞인 다종 존재 간 경계를 추적해왔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호주 시드니 뉴사우스웨일스 주립미술관(2022년), 미국 마이애미 배스 미술관(2022년), 로스앤젤레스(LA) 현대미술관(2017년), 쿤스트하우스 브레겐츠(2017년),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2017년) 등이 있다.
[송경은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