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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몇 년 앞서가 길목 지키고 있는 中, 우리 미래가 막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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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쓰나미 어떻게 넘을 것인가] [4]
중국 오성홍기와 반도체 일러스트. /연합뉴스

중국 오성홍기와 반도체 일러스트. /연합뉴스


[중국 쓰나미 어떻게 넘을 것인가] [4]

중국은 더 이상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가 아니다. 지금 당장 경제성이 없거나 성숙도가 낮아 다른 나라가 시도하지 않는 기술을 개발해놓고 그 시장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미래의 길목을 선점하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시장이 열렸을 때는 중국 기술이 그 산업의 표준이 된다. ‘게임 체인저’가 되는 것이다. 반도체·원전·배터리 등 한국의 주력 산업은 물론, 인공지능(AI)·로봇·드론 등 미래 산업 전반에서 ‘먼저 가서 길목을 지키는’ 중국의 전략은 한국의 미래를 없애고 있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답도 중국의 성공 전략 안에 있다.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등 국내 배터리 3사는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 시장 점유율 35%를 차지하는 글로벌 강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CATL과 BYD 등 중국 업체들의 점유율이 60%를 넘었고 국내 업체들은 20%로 급락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나. 배터리는 고급 고가인 NCM 배터리와 저급 저가의 LFP 배터리로 나뉘는데 우리는 LFP는 도태될 것으로 보고 NCM에 치중했다. 하지만 중국은 집요하게 값은 싼데 효율은 괜찮은 LFP 개발을 추구해 결국 성공시켰다. 우리가 그 가능성을 보고 시작했을 때 이미 길목을 중국이 지키고 있는 형국이 된 것이다. 중국은 차기 배터리인 나트륨 이온 배터리도 먼저 상용화에 성공해 다음 길목도 지키고 있다. 앞으로 전기차 시장이 커지면 커질수록 중국의 장악력도 더 확대되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앞서 있는 반도체 산업에서도 중국의 길목 지키기가 점점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절대 강자였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른바 ‘단수 쌓기’ 경쟁에 몰두하는 사이, 중국 YMTC는 전혀 다른 공법인 ‘본딩’ 기술을 개발했다. 이 중국 기술은 단숨에 판을 뒤집을 수 있는 ‘게임 체인저’의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중국 업체들이 기존 기술로는 한국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보고 아예 새 장을 열기로 한 것”이라고 했다. 중국이 이 길목을 지키다 미래에 큰 시장이 열리면 한·중 반도체 전쟁은 역전될지도 모른다.

기술의 길목을 선점한 뒤 시장이 커지기를 기다리는 중국 전략의 핵심 중 하나가 특허를 통해 글로벌 표준을 선점하는 것이다. 통신·AI·전기차 등 미래 산업에서 표준 장악은 ‘고기를 잡는 법’을 넘어 ‘어장(漁場)의 소유권’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일 정도로 산업 전체의 부와 권력을 통제하는 강력한 전략이다.

중국 통신 장비 업체 화웨이는 4G 시대까지는 후발 주자였음에도 남보다 먼저 5G 표준을 장악하기 위한 전략을 펼쳤다. 5G 기술 구현에 반드시 필요한 표준 필수 특허(SEP)를 9597건 확보해 2위 퀄컴(8046건)을 따돌렸다. 미래의 길목을 선점한 것이다. 이제 5G 기기를 만드는 거의 모든 기업이 화웨이에 로열티를 내야 한다. 화웨이는 미국의 집중적인 표적 제재에도 무너지기는커녕 더 번성해 이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글로벌 리더가 됐다. 그 이유 중 하나가 5G 표준 장악의 힘이다. 지금 화웨이는 6G 표준 논의에서도 AI와 네트워크 결합 기술 등을 제안하며 앞서가고 있다. 6G 길목도 선점해 시장이 열리기를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남들이 하지 않는 신기술 개발, 특허출원, 표준 제정으로 이어지는 전략은 개별 기업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이 중심이 된 국가 차원 백년대계의 일환이다. 중국은 2035년까지 독일·일본을 추월하고, 공산당 정권 100년인 2049년엔 미국까지 넘겠다는 로드맵을 추진하고 있다. 이 계획의 핵심은 군사력이 아니라 산업 굴기다. 첨단 기술, 미래 기술 개발은 기업이 하지만 그 뒤엔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다.


작년 말 중국은 화웨이·바이두·텐센트 등 빅테크 기업과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국가 차원의 ‘AI 표준화 기술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는 대규모 언어모델(LLM), 데이터 관리, AI 윤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가 표준을 제정한 뒤 이를 국제 표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원대한 계획의 총사령탑이다. 2026년까지 최소 50개의 AI 국가 표준 제정을 목표로 하고 있다.

‘빠른 추격자’에서 ‘선도자’로의 전환은 한때 우리의 목표였다. 2013년 박근혜 정부가 이 구호를 내걸고 노동·교육·금융·공공 등 4대 부문 개혁으로 한국 경제의 체질 개선을 시도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뀐 뒤 이전 정권의 정책은 모두 적폐로 몰려 뒤집혔다. 이후 출범한 정권들은 대부분 5년 임기만 보는 근시안적 시야와 포퓰리즘에 매몰돼 미래를 선점할 수 있는 모험적인 정책 수립과 투자에 큰 관심이 없었다.

중국이 미래 첨단 산업의 필수인 전력 확보를 위해 현재 58기인 원전을 2035년까지 최대 180기로 늘리는 계획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는데, 한국은 탈원전이라는 이념 자해극까지 벌이는 것이 단적인 차이다. 30~40년을 내다보고 산업의 미래 길목 곳곳을 다 지키고 있는 중국 앞에서 공들여 쌓은 탑도 무너뜨리는 우리가 상대가 될 수 있겠나. 돈도, 인재도, 시장도 훨씬 많고 큰 중국은 시간 제한 없이 일하는데 연구소조차 불을 꺼버리는 우리가 미래 경쟁을 할 수 있겠나.


여야가 합의로 과학기술 대계를 세우고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10년, 20년 일관되게 밀고 나갈 것을 국민 앞에 약속해야 한다. 기업이 마음껏 뛸 수 있도록 주 52시간 등 낡은 규제들을 혁신해야 한다. 국내 인력만으론 중국과 경쟁할 수 없다. 세계 최고 인재들을 과감히 불러모아야 한다.

우리가 먼저 가서 지킬 수 있는 길목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중국과 모든 분야에서 경쟁할 수는 없다. 반도체, 바이오, 조선, K컬처 등 우리가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해 집중 투자해야 한다. 이대로는 미래가 없어질 판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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