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문자를 힘차게 물결치는 듯한 이미지로 표현하며 전시장 벽과 바닥을 덮은 이란 작가 파라스투 포로우하르의 설치 작품 ‘쓰여진 방’(Written Room). 전남수묵비엔날레 본전시장 격인 목포문화예술회관 4전시실에서 볼 수 있다. 노형석 기자 |
현대미술 애호가들에게 초가을 전시 나들이는 남녘행이 맞춤하다. 거장·대가부터 신예까지 국내외 쟁쟁한 시각예술가들이 다채로운 장르를 넘나들며 남도 곳곳에 큰 전시판을 벌여놓았다. 삶을 보듬는 디자인 제품을 대거 선보인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체육관을 미술 공간으로 변신시킨 전남수묵비엔날레, 전통 수묵화와 서구 까망 그림을 한자리에 비교한 전남도립미술관 특별전 등이 손짓한다.
미술관으로 변신한 체육관
체육관이 미술관으로 변신했다. 지난 20여년간 글로벌 기획자로 활동해온 윤재갑 큐레이터가 전시감독을 맡은 4회 전남수묵비엔날레(10월31일까지)에서 가장 흥미로운 볼거리는 주 전시장인 목포실내체육관의 베니어판 전시 공간이다. 지난 4~5월 천장 층고가 높고 많은 작품을 효율적으로 전시할 공간을 고심하다 체육관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1주일 만에 가로 2.4m, 세로 1.2m의 연둣빛 베니어판 1374장을 격벽과 바닥에 두르고 구획해 산뜻한 현대미술 전시 공간으로 변신시켰다. 전시장 한가운데 고서 조각들이 여러개의 기둥을 이루며 솟아오른 전광영의 설치작품 ‘집합001-MY057’을 비롯해, 수묵화를 레고로 구현한 황인기 작가의 작품 ‘오래된 바람’, 여명의 빛을 획을 긋는 듯한 기법으로 형상화한 하동철 작가의 아련한 추상회화, 중국·일본·인도네시아 작가들의 전위적인 회화 설치 작업 등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목포실내체육관 공간 한가운데 놓인 전광영 작가의 설치 작품 ‘집합001-MY057’. 노형석 기자 |
본전시장 격인 목포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선 아랍 문자를 힘차게 물결치는 듯한 이미지로 표현하며 전시장 벽과 바닥을 덮은 이란 작가 파라스투 포로우하르의 설치 작품 ‘쓰여진 방’(Written Room)과 자유분방한 필치를 보여주는 일본 작가 사와무라 수미코의 대작 등을 볼 수 있다. 또 다른 전시장인 해남 땅끝순례문학관의 ‘순례객들의 오마주’전에는 프랑스 대가 로랑 그라소가 공재 윤두서의 기마도와 겸재 정선의 금강산 그림을 모사한 이미지와 태양의 동심원 이미지를 3개의 병풍 모양으로 병치시킨 독특한 구성의 3면화 ‘과거에 대한 고찰’(2021)도 나왔다. 빈약한 전시 공간과 명확하지 않은 정체성, 출품작의 수준 편차로 여전히 적잖은 비판을 받는 행사지만, 프로 기획자의 재치와 열정 덕분에 나름 눈길 끄는 작품 마당이 됐다는 평이 나온다.
전남수묵비엔날레의 전시 공간 중 하나인 해남 땅끝순례문학관의 ‘순례객들의 오마주’전에 나온 프랑스 작가 로랑 그라소의 3면화 ‘과거에 대한 고찰’(2021). 공재 윤두서의 기마도와 겸재 정선의 금강산 그림을 모사한 이미지와 태양의 동심원 이미지를 3개의 병풍 모양으로 병치시킨 독특한 구성의 작품이다. 전남도립미술관 개관전에 출품됐다가 미술관 소장품이 됐다. 노형석 기자 |
삶을 보듬어주는 디자인
광주시 용봉동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서는 ‘너라는 세계: 디자인은 어떻게 인간을 끌어안는가’를 주제로 포용 디자인의 가치와 의미를 전하는 ‘2025 광주디자인비엔날레’(11월2일까지)가 열리고 있다. 19개국 429명의 참여 작가가 163점의 작품을 선보이는 이번 비엔날레의 가장 큰 특징은 주제에서 보이듯 사람들의 삶을 챙기고 돕는 디자인 제품들이 대거 등장했다는 점이다. 노약자나 신체 장애인들을 위한 감자칼, 청소도구 같은 생활용품부터 기후위기와 해수면 상승을 대비한 사회적 구조물, 성소수자와 이민자 등을 연결하는 앱, 신체 감각을 확장하는 공간과 자동차 등이 나와 색다른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장애인의 공포영화 체험을 도와주는 피부 접촉 오감 기기, 험지를 가는 무인 운송차, 장애인을 위한 첨단 의수·의족 디자인 등이 현대적인 미감으로 다가온다.
‘2025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 출품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디자인팀이 연구 개발한 로봇 엄지손가락 연장 장치 ‘세번째 엄지손가락’. 노형석 기자 |
미디어아트의 최전선
광주미디어아트플랫폼에서는 감각적인 국내외 실력파 미디어 작가들의 작업을 선보이는 ‘감각과 예술’전(11월16일까지)이 2~4전시실과 외부 미디어 파사드 월에서 열린다. 8명의 국내외 작가들이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감각적 환경’을 화두로 예술과 기술의 융합, 인간과 비인간, 기술과 자연의 관계를 조명한다. 미세입자, 지진파, 암석 등 일상에서 감지되지 않는 자연현상을 비롯해 에너지 소비 불균형, 인공지능, 머신러닝 등을 미디어아트 작품 등으로 선보인다. 땅속 지층과 나무, 이끼 등의 세부를 재구성해 가상세계의 공간처럼 보여주는 구기정 작가의 디지털 이미지를 비롯해 광주 무등산 등에서 채집한 돌을 픽셀 단위로 쪼개 알파벳 문장으로 바꾼 노리미치 히라카와의 작업, 지진과 화산, 빙하의 유동 등을 기록한 정보를 색과 소리, 파동으로 바꿔 몰입형 풍경을 빚어낸 영국 2인조 작가팀 세미콘닥터의 영상 설치물 ‘어스워크’(Earthworks) 등이 눈에 들어온다.
전남도립미술관의 기획전 ‘블랙 앤 블랙’에 나온 프랑스 작가 장 드고텍스의 검은 톤 추상회화 ‘무제’(1954). 전남도립미술관 제공 |
동서양 거장들의 블랙 대결
동아시아 수묵 남종화와 1950년대 서구 블랙 회화가 처음 한자리에 놓였다. 광양 전남도립미술관의 ‘블랙 앤 블랙’전(12월4일까지)은 이들을 현대미술의 관점에서 교차 조망하는 초유의 전시다. 국내외 20명의 작가가 참여해 회화와 도자기, 영상 설치 등 70여점을 소개하는데, 서구 거장 피에르 술라주, 한스 아르퉁, 장 드고텍스, 로버트 마더웰, 자오우키 외에도 한국 현대미술을 이끈 이우환, 이응노, 이강소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공재 윤두서에서 시작해 소치 허련, 의재 허백련, 남농 허건으로 이어지는 남도 수묵의 전통적 명작들과 현대 수묵을 잇는 김호득, 정광희, 최종섭, 송필용, 박종갑, 설박, 황인기, 박정선 등의 근작들이 나와 한국 수묵의 오늘과 내일을 한자리에서 보여주면서 비교 감상 기회를 제공한다. 여백과 비움, 번짐을 매개로 미를 탐색해온 이 땅의 전통 회화와 수묵화에 비해 서구 현대미술은 블랙의 물질성과 평면성을 활용해왔지만, 양 진영 모두 블랙을 부재가 아닌 생성의 근원으로 봤다는 공통점도 감지하게 된다. 파리시립 세르누치아시아미술관, 프랑스 국립현대미술센터, 아르퉁재단 등 프랑스 기관과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등 국내 여러 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성사된 전시다.
목포 광주 광양/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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