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중심지를 둘러싼 패권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국내 주요 은행들이 해외 거점 재편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장하(왼쪽부터) LG에너지 솔루션 법인장, 이진수 폴란드지점 지점장, 이호성 하나은행장, 태준열 주폴란드 대한민국 대사, 안나라다 폴란드지점 부지점장 등이 브로츠와프 지점 개점식에서 테이프를 자르고 있다. [하나은행 제공] |
[헤럴드경제=김벼리 기자] 글로벌 금융중심지를 둘러싼 패권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국내 주요 은행들이 해외 거점 재편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전통의 금융 도시가 쇠퇴하고 신흥 중심지가 급부상하는 지각변동 흐름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24일 금융권에 따르면 국내 주요 은행들은 최근 글로벌 금융 환경에 대응해 미국 서남부와 동남아시아, 동유럽 등 해외 거점을 다변화하고 있다.
하나은행은 23일(현지 시각) 유럽 폴란드 브로츠와프 지점 개점식을 열었다. 이번 개점으로 하나은행은 영국,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헝가리, 체코 등 기존 거점과 함께 유럽 주요 전역에 걸친 영업망을 갖추게 됐다. 앞으로 유럽 영업을 총괄하는 런던 지점, 독일 법인 등과 중동부 유럽 지역 영업을 본격화할 계획이다.
폴란드는 중동부 유럽과 서유럽을 잇는 경제· 물류 허브다. 약 4000만명의 내수 시장과 성장세 등 투자 친화적 환경을 갖췄다고 하나은행은 설명했다. 우크라이나 전후 재건 사업의 전초 기지로도 떠오르고 있다. 하나은행은 외국환과 리테일(소매), 기업금융 등의 다각적인 금융 서비스를 공급할 방침이다.
하나은행은 미국에서도 기존 뉴욕 등 동부 중심에서 서남부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지난달 LA에 22년 만에 지점을 연 것이 대표적이다. 현지 한인·한국계 기업 지원은 물론, 글로벌 자금센터 설립으로 비거주자 원화거래 수요를 흡수할 계획이다. 또한 다음달에는 인도에 지점을 열고 남아시아 신흥 거점도 확보할 예정이다.
KB국민은행은 글로벌 사업을 선진국과 동남아 시장으로 양분해 전개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인도네시아 시장을 ‘제2의 모(母)마켓(Mother Market)’으로 키울 계획이다. 캄보디아 KB프라삭은행과 인도네시아 KB Bank(뱅크)를 핵심 축으로 삼아 현지 기업 대출과 디지털 금융 기반 확대에 집중한다.
신한은행은 지역별 분산과 기능별 전문화 작업을 진행 중이다. 특정 지역에 국한되기보다는 고객, 산업, 자금 흐름, 규제 안정성, 유동성 등을 고려해 각 거점이 역할을 분담하고 시너지가 나도록 시스템을 고도화하고 있다. 우리은행은 지난 8월 미국 오스틴 지점을 열고 남부 지역 진출 기업 지원을 강화했다. 방산 수출 확대에 맞춰 폴란드에도 거점을 마련했고, 동남아 거점 확대를 위해 동남아시아성장센터도 세울 계획이다.
4대 시중은행 본점 모습. [각 은행 제공] |
은행권이 해외 거점 다변화에 속도를 내는 것은 최근 글로벌 금융 시장에서 신·구 중심지 간 지각변동이 뚜렷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위원회가 최근 국회 정무위원회에 제출한 ‘금융중심지 조성과 발전에 관한 시책과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 런던이나 홍콩, 일본 도쿄 등 전통 글로벌 중심지의 경쟁력이 약화하고 미국 서남부 등 신흥 금융 중심지가 급부상하면서 글로벌 금융중심지 간 경쟁이 격화하고 있다.
전통 중심지들은 정치·사회적 여건이 변화하는 동시에 코로나19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경쟁력이 떨어졌다. 런던은 지난 2016년 ‘브렉시트’ 이후 유럽연합(EU) 금융 시장으로 접근성이 악화하면서 위상이 낮아지고 있다. EY에 따르면 지난 2022년 기준 영국 대형 금융사의 44%는 일부 기능과 인력을 EU로 재배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2017년(24%)보다 1.8배가량 늘어난 수준이다. 홍콩은 중국의 ‘국가안전법’과 코로나19 대응 등 여파에, 일본 도쿄도 거시경제 성과 부진 등으로 입지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반면 특정 분야와 지역의 발전에 기초한 특화형 중심지들은 새로 떠오르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미국 서부의 샌프란시스코와 LA 등이다. 이곳은 IT와 미래첨단산업 발전, 인적 자원 등을 토대로 벤처캐피털과 핀테크 기업이 몰리고 있다. 프랑스 파리는 지속가능 금융 분야에서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고,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는 국가 주도 아래 중동권의 금융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기존 금융중심지가 예전보다 입지가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영향력은 크다”며 “신흥 거점과 기존 거점 두 지역을 동시에 공략하는 글로벌 ‘투트랙’ 전략을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9일(현지시간) 백악관 집무실에서 새로운 미국 영주권 비자인 ‘골드카드’ 관련 행정명령에 서명한 뒤 들어보이고 있다. [로이터] |
다만 현지 대내외적 리스크는 걸림돌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21일 전문직 비자인 ‘H-1B 비자’에 대한 신규 신청 수수료를 1인당 10만 달러(약 1억4000만원)으로 증액하겠다고 발표했다. H-1B 비자는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분야의 전문 직종에 적용되는 비자다. 은행권에서는 이번 조치의 직접적인 영향은 제한적으로 보고 있지만, 현지 기업이 해당 규제에 타격을 입게 되면 은행에도 불똥이 튈 수 있는 만큼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미국에 파견된 직원들의 경우 해당 규제 적용 대상은 아니라 당장 미칠 영향은 없다”면서도 “정책적 불확실성이 큰 데다 현지 거래처에서 비자 관련 문의가 빗발치고 있어 긴장 상태”라고 상황을 전했다.
은행권의 또 다른 신흥 거점인 동남아시아에서는 당국의 몽니 등이 주요 대외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인허가 규정과 별개로 부가 자료나 보완 자료 제출 등 당국의 재량이 큰 실정이다. 이에 따라 승인 기간이 길어지고, 사업 중에도 다양한 변수가 제동을 걸고 있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동남아시아는 당국에서 부과하는 과태료를 일종의 관행이자 비용으로 보고 있을 정도”라며 “불필요한 비용 때문에 사업을 전개하는 데 제약이 크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은행들은 보고서 제출 등 형식적인 이유로 빈번하게 제재를 받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1년간 4대 시중은행이 해외 당국에서 받은 제재 건수(28건)에서 동남아 지역(16건)이 차지하는 비중은 57.1%에 달했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금융 중심지 이동은 단순히 지점을 하나 더 여는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자본·규제·정치 환경 변화와 맞물린 복합 변수”라며 “비자·금융 규제, 지정학적 리스크 등 불확실성 속에서 은행들이 해외 거점 다변화 전략을 고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