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우석 |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특별히 휴가도 가지 않고 딱히 피서 활동도 하지 않았지만 지난여름을 잘 난 건 수영 덕분이다. 일주일에 두세번씩 수영장에 가서 강습도 받고 놀다 오면 몸도 상쾌하니 가볍고 마음도 헐렁해졌다. 젊은 날 배운 영법들을 개인 강습으로 다시 꼼꼼하게 점검하며 익히니 25m만 헤엄쳐도 헉헉대던 몸이 100m를 하고도 가뿐하다.
내가 사는 서울 정릉에서 수영장이 있는 종로4가까지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여러 정류장을 지난다. 삼선교를 지날 때는 이런 안내방송이 나온다. ‘다음 정류장은 조소앙 활동 터입니다’. 무심히 듣다 어느날 조소앙은 이곳에서 무슨 활동을 했을까 궁금해졌다. 3·1운동이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이런저런 글도 쓰고 여행학교 학생들과 서울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 같은 걸 한 터라 그래도 일제강점기나 해방공간의 인물들에 대해 꽤 안다고 생각했는데 조소앙은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다.
조소앙이 삼선교 근방에서 활동한 건 해방 이후다. 그는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성균관에 입학해 공부하던 조소앙은 황실 특파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공부하다 요시찰 인물이 되어 중국으로 망명한다. 상하이에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던 그는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는 데 일익을 담당한다. 임시정부 수립 이후 조소앙은 스위스·영국·덴마크·리투아니아·벨기에·에스토니아 등을 다니며 조선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외교 활동을 한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회의에도 참석한다. 조소앙의 활동 영역을 가늠하다 보면 이 시대 한반도 사람들의 세계인 감수성과 기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당시 서울에서 경의선이나 경원선을 타면 중국을 거쳐, 러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이동이 가능했다. 한반도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신념과 이상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만들고 연결의 감각을 확장했다.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조선의 독립을 전세계와 함께 풀어갈 과제로 설정하고 다른 피억압 국가들과 연대했다. 분단만 되지 않았더라면 우리 또한 그 감각을 두렷이 유지하며 살았을 것이다. 조소앙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성북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다음 정류장은 여운형 활동 터다. 혜화동 로터리는 사실 여운형이 암살된 곳이다. 살아생전 그의 활동 터 또한 드넓고도 광대했다. 서울뿐 아니라 상하이·이르쿠츠크·모스크바 등 유라시아 대륙을 넘나들며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무엇보다 그는 멋쟁이였다. 멋진 슈트에 근사하게 정돈된 콧수염, 끝이 뾰족한 구두를 신고 찍은 사진들을 보면 후줄근한 시대를 살면서도 멋과 유머를 잃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는 스포츠를 좋아했다. 청년들을 일으켜 세우는 데 스포츠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게 그가 가진 생각이었다. 스포츠맨답게 그는 상하이 야구장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암살된 날도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가입 축하 기념으로 서울 운동장에서 한국과 영국의 친선 축구경기가 열린 날, 당시 체육부 장관이던 그는 경기 참관을 위해 이동하던 중 암살당했다. 진영을 넘나들며 가장 유연하게 독립운동을 하던 이, 생과 사를 넘나들면서도 멋과 취향을 잃지 않던 이의 이름이 혜화동 로터리 버스정류장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곳에서 두 정거장 다음은 김상옥 의거 터다. 김상옥에 관해서라면 임경석 선생의 ‘독립운동열전’ 중 ‘경성 천지를 뒤흔든 김상옥의 총격전’ 편을 권한다. 독립운동 관련 이야기가 조금은 뻔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특히 더 읽어볼 일이다. 손에 땀을 쥐고 읽게 만드는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혹독하게 추운 날이었다. 해 뜨기 직전 경성의 기온이 영하 18.8도를 가리킬 정도로 한해 가장 추운 시기였다. 이틀 전에는 큰 눈까지 내렸다. 새벽 5시였다. 그날 일출 시각이 7시49분이었으니까 동이 트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무리 장정들이 남산 서남쪽 산속에 위치한 삼판동(오늘날 후암동)의 한 민가를 은밀하게 에워쌌다. 도합 21명이었다. 종로경찰서와 동대문경찰서 소속 경관들로 이뤄진 형사대였다.’ 이후의 이야기는 어떤 영화보다 재밌으므로 일독을 당부한다. 1 대 21의 놀라운 총격전을 벌이게 되는 주인공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이다. 당시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가 탄압의 본거지였다. 김상옥은 3·1세대다. 386세대, 촛불세대, 키세스세대 이전에 3·1세대가 있었다. 박헌영·주세죽·허정숙·고명자·이미륵·김단야…. 1919년 3·1운동을 경험한 수많은 청년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3·1운동은 독립운동의 영혼이고 심장이었다.
수영장은 김마리아길에 연해 있다. 김마리아길이라 이름 붙여진 건 이곳이 정신여고 옛터이기 때문이다. 김마리아는 1910년 정신여고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곳에는 550살이 넘은 회화나무가 서 있다. 정신여고가 일본 관헌의 수색을 받았을 때 비밀문서와 태극기 그리고 교과목으로 금지되었던 국사 교재들을 이 고목의 빈 구멍에 숨겨 위험한 고비를 넘겼고, 후에 각종 비밀문서를 보존하였다는 안내서가 붙었다. 김마리아는 도쿄 유학 당시 2·8독립선언 여성 대표로 참여한다. 2·8독립선언은 암만 생각해봐도 몹시도 담대한 일이었다. 일본에 간 조선 유학생들이 적들의 심장에서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2·8독립선언서를 옷 속에 숨겨서 고국으로 가져온 이도 김마리아였다. 김마리아의 담대함은 집안 내력이기도 했다. 삼촌 김필순은 안창호와 결의형제를 맺은 신민회원이자 한국 최초의 의사였고 고모 김순애는 독립운동가 김규식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여성이다. 온 가족이 독립운동에 나선 그야말로 독립운동 명문가였다.
독립기념관장이라는 자가 독립은 연합군의 선물이었다, 라고 말하는 건 그러므로 틀렸다. 독립은 수많은 수많은 사람들이 헌신하고 희생하며 일구어낸 결과다. 서울 땅 곳곳이 독립운동의 현장이고 한반도 구석구석 독립운동의 장이 아니었던 곳이 없다. 서울에서 버스만 타 봐도 알 일이다. 유라시아 대륙, 하와이, 미국, 멕시코, 쿠바도 빼놓을 수 없다. 게으르고 무지한 자가 앉아 있을 자리는 아닌 듯하다. 피와 땀과 눈물, 목숨을 바쳐서 나라를 구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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