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 화백 10주기 특별전 |
(서울=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 "천국과 지옥도를 그리겠다고 큰소리를 떡 쳐놨네요. (중략) 그걸 그리고 죽어야 되겄어요."(미완의 작품 '환상여행'에 대한 천경자의 육성 인터뷰 중)
천경자(1924∼2015) 화백 10주기를 맞아 여러 시기에 걸친 그의 작품과 고인의 삶을 한자리에서 만나보는 전시회가 막을 올린다.
서울미술관은 특별기획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를 24일부터 내년 1월 15일까지 서울 부암동 본관 M1 제1전시실에서 개최한다.
국립현대미술관, 갤러리현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등 18개 미술관과 개인 소장자 및 문학관 등의 협조를 받아 천경자가 194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그린 회화 80여점을 모았다. 타이틀은 그의 작품과 자서전 제목인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에서 가져왔다.
23일 둘러본 전시장은 '사회에 저작권과 작품을 환원한 최초의 화가', '개인전마다 장사진…위대한 귀환', '포탄 속에서도 피어난 꽃', '세계를 누비며 자신을 해방시킨 천옥자(천경자 본명)', '운명의 굴레를 벗어던진 당당한 여성초상화', '예술이 되어버린 책', '그러나 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이다' 등 7가지 테마로 천경자의 작품과 생애를 조명했다.
천경자 10주기 특별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 |
천경자가 "나의 그림들이 흩어지지 않고 일반 시민들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바란다"며 1998년 11월 채색화 57점과 드로잉 39점, 붓·물감 등의 화구를 서울시(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던 일이나 전시회마다 장사진을 이루고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신여성 화가의 활동을 소개한다.
천경자가 베트남전 파병 때 종군 화가 10명 중 유일한 여성으로 참가해 사이공(현 호치민)에서 20여일간 머물며 남긴 그림도 일부 볼 수 있다. 총을 들고 있는 맹호사단 부대원을 그린 담채화에서 전장의 모습이 엿보인다. 살육의 현장에 꽃을 대비시켜 주목받은 '꽃과 병사와 포성'은 국방부 협조를 받아 개막 이틀 뒤인 26일부터 전시된다.
25년 동안 13차례에 걸쳐 외국에 장기 체류한 경험이 바탕이 된 회화도 따로 모았다. 프랑스의 후기 인상파 화가 폴 고갱(1848∼1903)이 말년을 보낸 타히티섬을 비롯해 미국, 이탈리아, 스페인, 태국 등에서 그린 풍경과 인물을 통해 경계를 넘은 화가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
2018년 국내 경매에서 20억원에 낙찰돼 화제가 됐던 채색화 '초원Ⅱ'(1978)도 관람객을 기다린다. 1974년 다녀온 아프리카 여행을 모티프로 삼은 이 그림은 대자연을 배경으로 사자, 얼룩말, 물소 등 다양한 야생동물과 코끼리 등에 엎드린 벌거벗은 여인을 함께 표현했다.
가부장제의 굴레를 벗어나 운명을 개척하고 화단에 큰 영향을 미친 천경자가 그린 여러 여성의 인물화도 눈길을 끈다.
천경자의 그림은 출판업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대 인기 작가들과 교분이 계기가 돼 그의 그림은 다양한 책 표지가 됐다. 예를 들면 푸른 빛깔의 인물과 노오란 나비가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여인'은 1969년 6월 출간된 '현대문학' 15권 6호를 장식했다. 천경자의 작품이 활용된 잡지, 단행본 등 80여종의 출판물을 살펴볼 수 있다.
천경자 작가 작품으로 만들어진 책 표지 |
그림이 아니라 친구나 지인이었던 당대 문인들의 글을 통해서도 천경자를 만날 수 있다.
"화가 천경자는 / 가까이 갈수도 없고 / 멀리 할 수도 없다 // 매일 만나다시피 했던 / 명동시절이나 / 이십년 넘게 / 만나지 못하는 지금이나 / 거리는 멀어지지도 / 가까워지지도 않았다."(박경리 시 '천경자를 노래함' 중에서)
소설가 박경리(1926∼2008)는 이 시에서 천경자를 "좀 고약한 예술가"라고 다소 심술궂게 표현하면서도 변함없는 우정과 존경을 드러냈다. '명동백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소설가 이봉구(1916∼1983)는 "'지금쯤 촌역 앞에서 꽃을 그리고 있을까…' 다정해진 여류화가가 어디서 화필을 쥐고 서 있는지 문득 그리움이 사모쳤다"고 천경자를 모델로 한 소설 '앵도'(1956)를 쓰기도 했다.
천경자 화백의 '청춘의 문' |
천경자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나 그가 직접 작품에 관해 설명한 인터뷰 영상도 나왔다. 12월 6∼7일에는 천경자의 삶을 소재로 한 창작 연극 '슬픈 전설의 화가'가 이 미술관에서 무대에 오른다. 이번 전시 음성 안내에는 이금희 아나운서가 참여했다.
서울미술관은 "근대사의 큰 풍랑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최선을 다해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해 낸 한 명의 위대한 예술인으로 추앙하고자 한다"는 취지에서 전시회를 기획했다. 그래서 천경자 사후에 큰 파문을 일으킨 '미인도'는 전시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안진우 서울미술관 이사장은 "천경자 선생님을 더 이상 '위작 논란'이나 '미인도 사건'이 아닌 한 명의 작가로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천경자는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자신의 작품이라며 전시한 '미인도'가 '내가 그린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미술관 측은 진품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진위 논란은 천경자 사후에도 이어졌다.
'미인도' |
유족은 '위작임을 인정하고 사과하라'며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를 고소했는데 검찰은 '미인도는 진품으로 판단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허위 사실로 명예를 훼손했다며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는 '수사가 위법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원고 패소 판결이 확정됐을 뿐 미인도의 진위에 관한 사법부 판단은 나오지 않았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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