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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가공할 차이나 스피드, 속도는 한때 우리의 정체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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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쓰나미 어떻게 넘을 것인가] [2]
[중국 쓰나미 어떻게 넘을 것인가] [2]

지난 1월 중국의 생성형 AI 모델 ‘딥시크’가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미국 제재를 받는 엔비디아 고사양 반도체 대신 저가형을 사용해 챗GPT 못지않은 성능을 구현했다. 더 충격적인 것이 개발 기간이었다. 챗GPT(1년)보다 훨씬 짧은 ‘2개월’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차이나 스피드가 중국 굴기의 핵심이다.

10년 전 중국 리커창 총리는 “세계 최대 철강 생산국인 중국이 아직 볼펜심조차 못 만든다”고 개탄했다. 당시 중국은 전 세계 볼펜의 80%를 생산했지만, 핵심 기술인 볼펜심은 대부분 일본·독일 등에서 수입했다. ‘중국 제조업은 크지만 강하지 못하다(大而不强)’는 뿌리 깊은 콤플렉스였다.

10년이 지난 지금, 중국은 ‘저가 생산 공장’에서 ‘최강의 제조 강국’으로 환골탈태했다. 로봇·조선·전기차·배터리·우주항공 등 10대 전략 산업을 육성하는 ‘중국제조 2025’ 국가 전략의 결과다. 전 세계 산업용 로봇의 절반을 중국이 생산하고 있고, 우리는 명함도 못 내미는 우주항공 분야에서 무인 우주정거장 독자 운영과 달 뒷면 세계 최초 착륙이라는 성과를 냈다. 이 놀라운 변화가 단 ‘10년’ 만에 일어났다.

중국 제조업의 혁신 속도전은 가공할 정도다. 현대차·기아 등 국내 완성차 업체가 3~4년을 들여 신차 한 대를 개발할 때, 중국 전기차 업체는 1년 반 만에 신차를 쏟아낸다. 화웨이와 전기차 업체 세레스가 합작 설립한 아이토는 출범 2년 만인 2023년 12월 고급차 M9을 내놓았고, 단 1년 만에 중국 고급차 1위에 올랐다. 현대차가 고급차 브랜드 제네시스를 내놓을 때까지 걸린 기간(48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IT 세계 최고 기술력의 화웨이·샤오미와 기존 자동차 업체, 배터리 기업들이 한 몸이 돼 눈 깜짝할 사이에 전기차 생태계를 지배했다.

중국이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당시 제조업 경쟁력은 23위였다. 그것이 독일 다음의 2위로 수직 상승하는 데 불과 20여 년이 걸렸다. 100년이 넘는 제조 강국 역사를 지닌 미국이 4위, 일본이 5위, 한국이 3위다. 차이나 스피드는 ‘압축 고속 성장’의 대명사였던 ‘한강의 기적’과 다르다. 한강의 기적은 산업화 단계였지만, 중국은 산업화뿐 아니라 정보화와 AI 혁명까지 동시에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하버드대가 인공지능·바이오테크·반도체·우주·양자기술 등 5대 핵심 기술의 국가별 경쟁력을 평가했더니, 중국이 모든 분야에서 미국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반도체 5위, AI 9위, 바이오 10위였지만, 우주와 양자기술은 10위 안에 들지 못했다. 중국 제조업은 AI와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생산 현장에 접목하고 있다. 그래서 제조업 혁신을 선도하는 ‘등대 공장’ 41%가 중국에 있다.


속도는 경제와 산업의 승패를 좌우한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중국의 속도를 보면 우리가 못 따라가고 죽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고 했다. 이 차이나 스피드 역시 중국 공산당의 작품이다. 이들은 14억 인구의 거대 내수 시장을 기업들의 테스트베드(시험 무대)로 만들어 주었다. 중국 기업들은 다소 설익은 제품이라도 먼저 시장에 내놓고, 시장의 피드백을 통해 문제점을 빠르게 보완하며 완성도를 높인다. 공산당은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안전사고나 개인정보 유출 같은 문제를 눈감아준다. 서방이 따라 할 수 없는 차이다. 차량 자율 주행도 이렇게 단시간에 세계 최고로 올라섰다.

중국은 연구개발(R&D)도 원천 기술에 집착하지 않고 상용화를 중시하고 있다. 지난해 중국의 R&D 지출은 705조원으로 한국 전체 예산(656조원)보다 많았다. 그런데 중국 R&D 지출의 82%가 원천 기술 아닌 상용화를 위한 실험 개발 단계에 투입됐다. 원천 기술은 미국이 강하지만, 상용화는 중국이 우위에 있다.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내놓은 폴더블폰 시장에서 화웨이가 두 번 접는 스마트폰을 먼저 출시했다.

선진국을 도저히 따라잡기 힘들 때는 과감한 ‘건너뛰기’로 늦은 출발의 약점을 일거에 만회한다. 유선 전화를 건너뛰어 휴대폰 시대로 직행했고, 신용카드를 생략하고 모바일 결제로 넘어갔다. 정교한 내연기관 차량을 만들 기술이 부족하자 전기차로 점프했다.


자유시장 국가보다 더 치열한 중국 내부 경쟁도 속도를 부채질하고 있다. 200여 개의 전기차 회사 중 흑자를 보는 곳이 3곳에 불과할 정도로 무한 경쟁이다. 잠시만 방심해도 망한다. 중국 조선소들은 배를 조기에 완성하는 게 일상이 돼 있다. 연봉보다 성과급이 더 많으니 임직원들이 죽기 살기로 일한다. 군함 건조 속도 경쟁에서 미국이 중국의 상대가 될 수 없다. 매년 40만 명의 최상위 인재가 이공계로 진학하고, 엔지니어들의 연봉이 의사보다 많은 사회적 보상 체계가 속도전의 윤활유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의 속도전을 보면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가 굉음을 내며 무섭게 돌아가는 것 같다고 한다. 한때 ‘속도’는 한국의 장기이자 무기였다. 외국이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속도’는 ‘악’이 됐다. 사회 정치 갈등의 불길만 무서운 속도로 번지고 있다. SK하이닉스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투자 착수 6년 만인 지난 2월에야 착공에 들어갔다. 반도체 연구개발조차 주 52시간에 묶여 일하고 싶은 사람도 일할 수 없는 지경이다.

정권마다 전봇대 규제, 대못 규제, 거미줄 규제 등 규제 혁파에 나서겠다고 했지만 성과를 낸 적이 없다. 정치권이 진영 논리에 빠져 갈등과 분열을 조장했기 때문이다. 주 52시간제, 노란봉투법 같은 수많은 기업 규제는 필연적으로 속도 저하로 이어진다.


민주주의와 속도는 양립하기 어렵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주 52시간이 아니라 하루 24시간을 일한다는 일론 머스크는 미국인이다. 우리는 인구도 적고, 시장도 적고, 자원도 없고 기술도 어중간하다. 다시 한번 ‘한강 속도’를 내지 않으면 먹거리 자체가 없어질 수 있다. 여야 합의로 신기술과 신산업을 옭아매는 낡은 규제를 과감히 걷어내고 ‘선허용 후규제’ 원칙을 확립해 기업들이 앞만 보고 달릴 수 있게 해야 한다. 중국의 혁신 속도를 절반이라도 따라잡지 못하면 우리 제조업의 미래는 없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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