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쇼다 사건을 풍자한 만화. (출처: Joseph Morewood Staniforth, 1898,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898년 9월 19일, 아프리카 파쇼다에서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충돌 직전의 긴장 상태에 놓였다. 이는 아프리카 대륙을 남북으로 종단하려는 영국의 '종단 정책'과 동서로 횡단하려는 프랑스의 '횡단 정책'이 충돌한 사건이다.
당시 영국은 이집트의 카이로와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을 잇는 '케이프-카이로 철도' 건설을 추진하며 아프리카 종단 지배를 목표로 했다. 한편 프랑스는 대서양의 세네갈에서 홍해의 지부티를 연결하는 횡단 정책을 통해 아프리카 식민지 확장을 시도했다.
이 두 제국의 야심은 나일강 상류의 전략적 요충지인 수단 남부의 작은 마을, 파쇼다에서 정면으로 맞붙었다. 1898년 7월, 프랑스 탐험가 장바티스트 마르샹 소령이 이끄는 소규모 병력이 파쇼다에 도착하여 프랑스 국기를 게양했다. 이에 격분한 영국은 허버트 키치너 장군이 이끄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파쇼다로 진격했다.
파쇼다에 도착한 키치너와 마르샹은 직접 대면했으나, 양측 모두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외교적 해결을 모색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 본국 간의 치열한 외교 협상이 전개됐다. 프랑스 외무장관 테오필 델카세는 영국과의 전쟁이 자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 파쇼다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1898년 11월 3일 공식 발표됐고, 파쇼다 사건은 영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영국은 나일강 유역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확보했다. 이는 향후 이집트와 수단에 대한 영국의 식민 지배를 강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반면 프랑스는 아프리카 횡단 정책의 실패로 인해 영향력이 축소됐다.
이 사건은 유럽 국제 질서의 변화를 예고하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과 프랑스는 이후 독일의 부상에 맞서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길을 택하게 됐다. 이는 20세기 초 '영-프 협상'의 바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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