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출생 직후 뇌성마비 진단을 받고, 분만을 담당했던 산부인과 의사 2명이 불구속 기소된 사건을 두고 산과 의사들이 "산과 의사는 범죄자가 아니다. 산과 의사는 산모와 아기의 생명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라며 대국민 호소했다.
젊은 산과 교수 24인 일동은 13일 '벼랑 끝에 선 젊은 산과 교수들의 성명서'라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분만을 업(業)으로 삼고 고위험 산모, 태아를 돌보는 우리의 일상적 업무 속에서 러시안룰렛 같이 발생하는 불가항력적인 의료사고가 형사 기소의 대상이 되는 현실 앞에서 깊은 충격과 절망을 느낀다"고 했다.
앞서 대학병원에서 근무 중인 산부인과 전문의 A씨는 자연분만으로 출생한 아기가 출생 직후 뇌성마비 진단을 받은 사건으로 담당 교수와 함께 소송이 제기됐다. A씨는 당시 전공의 신분이었다. 민사 재판에서는 6억 5000여만원 배상 판결을 받았다. 형사 재판은 경찰 조사 단계에서 무혐의 결론이 났으나 검찰의 기소로 재판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의 기소에 대해 산과 의사들은 "뇌성마비는 임신 기간 약 7000시간 동안의 자궁 내 환경, 태반 기능, 조산 여부 등 장기간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며 "수 시간에 걸친 분만 진통 과정 자체가 뇌성마비의 원인인 경우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억울해한다.
이번 성명서에 이름을 올린 이들은 전국 대학병원에서 산모와 태아를 돌보는 30~40대 산과 교수 24명으로 이뤄졌다. 우리나라 전체 40개 의과대학에 산과 조교수는 36명이다. 이들은 "주말과 밤낮없이 호출에 응하며,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조차 포기한 채 고위험 병실과 분만실을 지켜왔다. 지난 의료대란 때도 우리는 분만실을 떠나지 않았다"며 "소수의 인력이 전국 병원에서 의뢰되는 임신중독증, 산후 출혈 등 여러 고위험 산모와 태아를 최일선에서 돌보며, 대한민국 산과 진료를 간신히 지탱해 왔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이들은 "그런데도 지금 우리는 환자를 도우려는 최선의 진료가 '범죄'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공포의 한 가운데 서 있다"며 "지금이라도 이 분만의 현장을 떠나야 할 것인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분만 관련 의료사고에 대한 형사 기소를 계기로 국가와 사법당국에 3가지 사항을 요구했다.
첫째, 의료사고의 불가항력성과 인과관계의 불명확성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임신과 출산에는 확률적인 일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모성 사망은 '출생아 1만명당 1명'의 빈도이며, 자궁 내 태아 사망은 200명 중의 1명의 빈도다. 뇌성마비의 빈도는 출생아 1000명당 2명이다. 이들은 "특히 뇌성마비는 긴 임신 기간의 자궁 내 환경, 태반 기능, 조산 여부 등 장기간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며, 분만 과정 자체가 원인이 되는 경우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며 "필수 의료 행위에 대한 과실 여부 판단은 반드시 이러한 불확실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가항력적 사고까지 산과 의사에게 형사 책임을 묻는 건 부당하다는 주장이다.
둘째, 의학적 최선의 판단을 사후적 관점에서 일률적으로 재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명서는 "의료인은 전문가적 경험과 최신 지식에 근거해, 그 순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을 내리지만, 사법적 판단은 종종 결과론적 관점에서 옳고 그름을 재단한다"며 "생명 현장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을 무시한 채 현미경의 잣대를 들이대어 의료행위를 평가하는 건 치열한 의료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며, 지양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런 사후적 평가는 의료인을 분쟁 회피 중심의 방어 진료로 몰아간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특히 산과는 산모와 태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신속하고 과감한 결단이 필요한 분야인데, 형사 기소의 두려움 속에서 소극적 선택만 한다면 피해는 환자와 가족,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런 흐름은 양심 있고 소신껏 진료하는 의료진을 현장에서 떠나게 하고, 남아 있는 이들마저 위축시켜 산과 진료의 기반을 무너뜨릴 것이라고도 이들은 호소했다.
셋째, 구조적 문제를 외면한 책임 전가를 중단하라는 것이다. 이미 전국 곳곳의 산모들이 분만 취약지에서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이유에서다.
성명서는 "의료사고는 분명히 줄여야 하지만, 이를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건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라며 "24시간 응급 대응이 필요한 분만의 특수성, 만성적인 인력 부족, 지역 분만 인프라의 붕괴, 의료전달체계의 미비 등 구조적 조건이 개선되지 않는 한, 유사한 사건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분만 시 발생하는 사고는 불가항력적임을 인정하고, 형사 기소 대상으로 삼지 말 것 ▲산모가 피해를 본 경우, 국가 차원의 안전망과 충분한 보상 제도를 마련할 것 ▲의료진이 산과를 떠나지 않도록 근본적인 제도적 대책을 세울 것 등을 외쳤다.
그러면서 "지금, 이 순간도 산모와 아기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병원으로 달려가는 우리 젊은 산과 교수들은, 이번 형사 기소 사건으로 인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대로라면 대한민국에서 산과는 사라질 것"이라며 "이 길 끝에 서 있는 우리의 절규를 더 늦기 전에
들어 달라. 국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검찰은 멈춰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 성명서에 이름을 올린 젊은 산과 교수는 ▲서울성모병원: 홍수빈 ▲경북대병원: 김혜민 ▲경상국립대병원: 이지선, 조인애 ▲경희대병원: 이영주 ▲계명대 동산병원: 이기수 ▲분당서울대병원: 김현지, 신하림, 정다은, 정영미 ▲서울대병원: 김지회 ▲서울아산병원: 고지혜 ▲세브란스병원: 권하얀 ▲전 순천향대 부속 서울병원: 오정원 ▲이대목동병원: 박선화 ▲영남대병원: 김효신 ▲중앙대병원: 남지나, 채단아 ▲중앙대광명병원: 김유민, 성지수, 양신호 ▲충남대병원: 이경노 ▲삼성서울병원: 성지희, 함수지 등 24인이다.
정심교 기자 simkyo@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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