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이유를 묻자 박소령은 이렇게 답했다. “첫째,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는 채 의사 결정을 해서. 둘째, 욕먹기를 두려워한 칭찬 중독자라서. 셋째, 가격과 사업 모델을 건드리지 않고 기우제 지내듯 구독자 늘기만을 기다려서.”/김지호 기자 |
2015년 4월 서울대 경영학과와 하버드 케네디스쿨을 졸업한 30대 여성 사업가가 ‘퍼블리’라는 스타트업을 론칭했을 때, 콘텐츠 업계는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한국 사회에서 성공한 적이 없는 텍스트 기반 콘텐츠 유료화 모델이 사업 핵심이었기 때문. 지난해 8월 퍼블리가 매각되었다는 소식에 업계 관계자들은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그간 퍼블리의 모든 시도는 무의미한가? 10년간의 여정을 ‘실패를 통과하는 일’(북스톤)이라는 책으로 낸 박소령(44) 전 퍼블리 대표를 지난 3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실패를 전면에 내세우다니, 실패를 부끄러워하는 한국 정서에는 낯선 책이다.
“내겐 ‘실패’라는 단어가 애초부터 무겁지 않았다. 사업이라는 건 실패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실패를 통해 성장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 사회는 실패를 낙인찍듯 무겁게 바라보는 것 같다. 다만 주주들에게 금전적 손해를 입혔고, 동료들의 커리어에 플러스가 되지 못했으니 주식회사 대표 입장에선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죄송한 마음을 승화해 표현하고 싶은 게 글을 쓴 동력 중 하나다.”
-또 다른 동력은.
“스타트업이 100개 출발한다면 성공하는 건 2~3개 정도인데, 망하거나 사라진 90몇 개의 이야기는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 조직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알음알음으로 공유되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라는 포맷으로 공개될 수 있다면 비슷한 길을 가는 이들이 맨땅에 헤딩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회의 생산성이 높아지는 일에 도움이 되고 싶어서 썼다.”
-사업의 시작과 끝, 레이오프 과정의 민낯까지 솔직하게 적었다. 후배 창업자들을 위해 쓴 책인가.
“정확히는 10년 전의 나, 혹은 그때의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위해 썼다. 창업뿐 아니라 목표를 세우고 그를 향해 가는 사람들에게 실패라는 단어가 너무 무겁게 다가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2025년 9월 3일 서울 중구 조선일보 미술관. 박소령 전 퍼블리 CEO가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김지호 기자 |
-퍼블리 매각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나는 콘텐츠가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우리 사회의 지식·정보 인프라가 상향 평준화되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미션이 창업의 시작이자 일을 계속한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더 이상 그 길에 서 있지 않다는 건 알게 됐다. 창업자가 그렇게 일하면 안 되는 게 회사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라 생각했다. 내겐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매각하거나, 적자를 껴안고 계속 가다가 돈 떨어져 문을 닫거나.”
-퍼블리 모델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뭘까.
“가격을 낮춰도 수요가 크게 늘어나지 않는 시장이어서다. 창업 초반엔 책 사는 데 월 5만~10만원 정도 쓰는 콘텐츠 헤비 유저들을 대상으로 비즈니스 관련 콘텐츠를 월 구독료 2만1900원에 공급했다. 나 같은 얼리 어답터들은 좋아했는데 머릿수가 5000명을 넘기 힘들더라. 그래서 다음 단계로 주니어 직장인을 타깃으로 했다. 회사에서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실무 관련 짧은 콘텐츠를 내놓았는데 유료 구독자가 5만명 가까이 될 때 가격을 9900원으로 낮췄다. 가격 낮추고 머릿수를 늘리면 시장을 키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2년 만에 깨달았다. 가격을 낮춘다고 콘텐츠를 소비하지 않던 사람들이 돈을 쓰는 시장이 아니라는 걸.”
-온라인 콘텐츠는 무료라는 사회 인식이 사업 실패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보편화하긴 어렵다. 웹툰이나 웹소설은 돈이 된다. 결국 독자가 돈을 지불할 만한 가치를 갖추지 못해서라고 생각한다.”
-2020년 4월 개발자들을 위한 소셜네트워크 서비스 ‘커리어리’를 론칭했다.
“더 큰 시장으로 가자 싶어 방향을 전환했다. 테크 기업 소속 개발자들이 이력을 등록하고 교류하며 취업·이직 제안 등을 받을 수 있는 커뮤니티로, 링크트인을 대체하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2년간 밀어붙였는데 성과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사업을 접기로 한 건가.
“커리어리를 시작하면서 이러면 콘텐츠랑 멀어진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투자자들과 팀원들,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는 욕심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 2년 후 정신 차려 보니 나는 콘텐츠 사업이 아닌 다른 사업을 하고 있었다. 내 마음에 불이 꺼졌다는 걸 깨달았다.”
박소령 전 퍼블리 대표의 책 '실패를 통과하는 일'./북스톤 |
-책 띠지에 ‘이 기록은 원래 공개되지 않을 예정이었다’라고 적혀 있던데.
“원래는 나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쓴 글이다. 올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 썼는데 200자 원고지로 약 1500매가 나왔다. 주변 사람들 중 나와 이해관계가 없으면서 솔직한 피드백을 줄 수 있겠다 싶은 20명을 택해 읽어 달라고 했다. 나에 대해 진실한 조언을 해 주시면 좋겠다는 목적이 있어서 보여드린 것도 있지만 10년을 덕분에 잘 보냈다는 감사의 의미가 1차적이었다. 초고를 읽은 분 중 일부가 다듬어서 바깥으로 내보내면 도움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 책으로 써 보라고 했다.”
-초고를 책으로 다듬으며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남들에게 도움이 되려면 어떤 글쓰기를 해야 할까 고민했다. 출판사에서 얻었던 피드백은 반성문이어서도 안 되고, 애매하게 자랑해서도 안 되고, 다이렉트하게 가르치는 글이어서도 안 된다는 거였다. 독자가 읽고 나서 생각하고 깨달을 수 있는 글쓰기를 고민했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콘텐츠의 힘을 빌려 대신 말해 보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영화·만화 등의 내용을 인용한 게 많다.”
-책에 인용한 콘텐츠가 100개가량이다. 그중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건?
“미국 투자자 찰리 멍거의 강연을 엮은 ‘가난한 찰리의 연감’. 저자는 인간이 빠지기 쉬운 심리적 경향 중 하나로 ‘사회적 증거(social proof) 경향’을 지적한다. 수수께끼나 스트레스가 존재할 때 주변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따라 하려는 경향이다. 내가 눈이 멀어 주관 없이 남들이 좋다는 걸 따라 한 이유를 정확하게 적어 놨다 싶어 소름이 돋았다.”
-제목은 왜 ‘실패를 통과하는 일’이라고 지었나.
“출판사에서 지은 제목이다. 실패를 전면에 내세운 게 좋았고, 드라이한 제목이라 좋았다. 나는 제목에 대해 아무 아이디어가 없었다. 책은 철저하게 상품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역지사지인데, 내가 퍼블리 대표를 할 때 저자와의 역학관계를 돌아보니 상품에 대해서는 패키징해서 파는 사람이 흥이 나도록 일임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주고 싶은 메시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정직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지난 10년간 얻은 가장 큰 교훈이다. 남들이 아무리 좋다 해도 주관 없이 따라가면 후회를 하게 된다. 어떤 결과가 와도 후회가 없으려면 내가 누구인지를 잘 알고, 내 몸에 맞는 옷을 골라야 한다.”
-실패를 통과해 궁극적으로 어디에 닿고 싶은가.
“한 번도 스스로에게 안 해본 질문이긴 한데…. 나는 모범생답게 ‘칭찬 중독자’의 삶을 길게 살아왔다. 기준값이 내 안에 있지 않고 타인에게 있었는데 그럴 때의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둘 다 경험했던 10년이었다. 기준값이 나의 내면에 있는 삶을 살고 싶다. 그게 곧 ‘자유’라는 단어와 동일한 것 같다.”
[곽아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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