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즈 서울 2025’ 전경. 미국 갤러리 하우저앤워스에 걸린 추상작가 마크 브래드포드의 회화 ‘그래, 그렇다면 내가 사과할게’(Okay, Then I Apologize, 2025) 곁으로 관람객들이 끊임없이 지나고 있다. 작품은 개막 첫날인 지난 3일 450만달러(약 62억 6000만원)에 팔려나가면서 ‘프리즈 서울’이 4회째를 진행해오는 동안 가장 비싸게 판매된 작품이 됐다. 나흘간 일정을 마치고 6일 폐막한 ‘프리즈 서울’에는 지난해 수준인 관람객 7만여 명이 다녀갔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제 시작인데 빨간딱지는 나중에 붙이는 게 낫지 않나요?” “아닙니다. 고가의 우리 작품도 팔린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한 질문에 복잡한 대답이 돌아왔다. 우찬규 학고재갤러리 대표의 목소리는 자못 결연했다. 국내 대표 갤러리인 학고재는 ‘프리즈 서울 2025’ 중 프리즈 마스터즈 세션에 나섰던 터다. 빨간딱지는 김환기의 회화 ‘구름과 달’(1962)에 붙었다. 40호 남짓(100.4×65.4㎝)한 이 작품은 첫날, 그것도 이른 시간에 이미 ‘팔린 작품’이었다. 작품가는 20억원. 그 앞으로 빨간딱지 하나가 더 보인다. 송현숙의 회화 ‘붓질의 다이어그램’(2019). “7만 5000유로(약 1억 2000만원)에 팔렸다”고 우 대표가 귀띔했다.
‘프리즈 서울 2025’의 학고재갤러리 부스에 걸린 김환기의 ‘구름과 달’(1962) 앞에 한 관람객이 오래 머물렀다. 작품은 20억원에 팔렸다. 올해 ‘키아프·프리즈 서울’에서 팔린 한국 작가의 작품 중 최고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또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뜨겁게 밀고 들어와 강하게 때리고 빠지는 ‘아트폭풍’ 말이다. 흥행 여부는 둘째치더라도 아트공화국인 양 대한민국 미술계를 들었다 놨다 했더랬다. 한 해 중 가장 떠들썩하게 치러지는 아트페어 ‘키아프 서울 2025’와 ‘프리즈 서울 2025’가 폐막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전관을 뒤흔든 두 아트페어는 ‘키아프 서울’이 7일까지 닷새간, ‘프리즈 서울’은 6일까지 나흘간 일정을 마무리했다. 2022년 ‘키아프리즈’로 처음 공동 개최한 이래 네 번째 행사였다. 키아프는 8만 2000여 명, 프리즈는 7만여 명의 관람객을 맞았다. 지난해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사실 올해 ‘키아프·프리즈’ 개막을 앞두곤 우려가 적지 않았다. 한국 미술시장 전반에 드리운 불황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판을 열고 보니 영 ‘다른 장면’이었다. 꽁꽁 닫혀 있던 지갑이 하나둘씩 열린 거다.
‘키아프 서울 2025’ 전경. ‘공진’을 주제로 참가한 갤러리 175개 중 해외 갤러리 50개를 대거 들이고 외형보다는 질적 성장에 공을 들인 키아프는 닷새간 8만 2000명의 관람객을 들이고 7일 폐막했다(사진=이영훈 기자). |
프리즈 ‘고가 작품’의 대항마는 키아프 ‘중·저가 작품’
발 빠르게 매출 현황을 공개한 작품 가운데 키아프·프리즈를 통틀어 가장 높은 가격대는 프리즈의 하우저앤워스 부스에서 나왔다. 미국 추상작가 마크 브래드포드의 ‘그래, 그렇다면 내가 사과할게’(Okay, Then I Apologize, 2025)가 일찌감치 450만달러(약 62억 6000만원)에 팔려나갔다. 아시아계 컬렉터가 사갔다는 작품은 캔버스 3개를 붙인 한 세트(150×334.6×5.1㎝)로, 이번 프리즈를 위해 제작한 신작이다. 뒤이어 조지 콘도의 신작 ‘퍼플 선샤인’(2025)도 120만달러(약 16억 7000만원)에 팔렸다.
‘프리즈 서울 2025’ 전경. 한 관람객이 조지 콘도의 ‘퍼플 선샤인’(Purple Shunshine, 2025)을 오래도록 지켜봤다. 하우저앤워스 부스에 걸린 이 작품은 120만달러(약 16억 7000만원)에 판매됐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프리즈 서울 2025’ 전경. 스프루스 마커스가 내건 조지 콘도의 ‘생각과 미소’(Thinking and Smiling, 2025). 관람객들의 발길을 연이어 이끈 작품이다. 180만달러(약 25억원)에 팔렸다. 아래는 로즈마리 트로켈의 조각 ‘화장지가 있어 천만다행’(Thank God for Toilet Paper, 2008)이 놓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하우저앤워스를 신호 삼아 프리즈 곳곳에서 판매사인이 터졌다. 타데우스로팍은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회화 ‘그것은 어둡습니다, 그것은’(2019)을 180만유로(약 29억원)에, 화이트큐브 역시 바젤리츠의 회화 ‘첫째로, 부탁드립니다’(2014)를 130만유로(약 21억원)에 판매했다. 스프루스 마커스는 조지 콘도의 ‘생각과 미소’(2025)를 180만달러(약 25억원)에, 메누르는 이우환의 회화를 60만유로(약 9억 7000만원), 우고 론디노네의 조각을 20만유로(약 2억 8000만원)에 팔았다. 리만머핀이 내놓은 라이자 루의 회화는 24만∼26만달러(약 3억 4000만∼3억 6000만원)에, 헤르난 바스의 회화는 22만 5000달러(약 3억원)에 팔려나갔다. 이외에도 데이비드 즈워너는 캐서린 번하드의 회화 ‘폴라리스’(2025)를 앞세워 후마 바바, 오스카 무리요 등의 작품을 판매 리스트에 올렸다.
‘프리즈 서울 2025’ 전경. 타데우스로팍이 내건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회화 ‘프랑스의 엘케’(Elke in Frankreich Ⅲ, 2019)가 보인다. 바젤리츠의 대형회화 3점을 가져온 타데우스로팍은 그중 ‘그것은 어둡습니다, 그것은’(Es ist dunkel, es ist, 2019)을 180만유로(약 29억원)에 판매했다. 빨간 핸드백에 긴 다리를 단 에르윈 웜의 조각 ‘덧없음’(Vanity, 2023)은 관람객의 시선을 집중시킨 작품 중 하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프리즈 서울 2025’ 전경. 메누르 부스에 세운 우고 론디노네의 조각 ‘노랗고 빨간 수도사’(Yellow Red Monk, 2024)가 이우환의 ‘다이얼로그’(2012)를 바라보고 있다. 론디노네의 조각은 20만유로(약 2억 8000만원)에, 이우환의 회화는 60만유로(약 9억 7000만원)에 팔려나갔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프리즈에 나선 국내 화랑도 선전했다. 국제갤러리에서 제니 홀저의 작품은 5억∼6억원대에, 하종현의 작품은 3억∼4억원대에, 갤러리현대에서 정상화의 회화는 8억 3000만원에, 존배의 조각은 4억 1000만원에 팔려나갔다. 이외에도 리안갤러리는 이진우·이광호·김근태 등의 작품을, 아라리오갤러리는 이진주·옥승철·나와 코헤이 등의 작품에 빨간딱지를 붙였다.
‘프리즈 서울 2025’ 전경. 정상화·존배·김보희 작가의 작품만으로 꾸린 갤러리현대의 부스를 관람객들이 돌아보고 있다. 그중 정상화의 회화가 60만달러(약 8억 3000만원)에, 존배의 조각이 30만달러(약 4억 1000만원)에 팔려나갔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프리즈가 ‘고가 작품’으로 치고 나갔다면 키아프는 ‘중·저가 작품’으로 뒤를 받쳤다. 선화랑이 이정지의 회화 ‘O 2020 심연’(2020)을 1억 6000만원에 판매한 것을 비롯해 갤러리제이원은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을 5억원에, 국제갤러리는 박서보의 작품을 4억원대에 팔았다. 가나아트는 시오타 치하루의 작품을 3억 2000만원에, 갤러리현대는 김창열의 작품을 2억원대에, 김보희의 작품을 1억 4000만원대에 판매했다. 또 갤러리가이아는 김병종(1억 5000만원), 유선태(6100만원), 예화랑은 박석원(7000만원), 노화랑은 이강욱(2점 6000만원), 갤러리위는 허필석(3000만원) 등의 출품 대표작을 컬렉터 손에 넘겼다.
‘키아프 서울 2025’ 전경. 국제갤러리는 우고 론디노네의 조각·회화·드로잉 등을 집중적으로 선보였다. 론디노네의 조각 ‘컬러 마운틴’ 연작은 모두 팔려나갔다(사진=이영훈 기자). |
이외에도 갤러리조은은 채지민(2500만원), 권용래(1700만원)를 앞세워 백윤조·성연화·마이코 코바야시 등을, 아뜰리에아키는 권능(2000만원)을 비롯해 임현정·정유미·정성준·윤상윤 등 출품작가 대부분을 판매리스트에 올렸다. 들고나온 작품을 모조리 털어낸 ‘완판’ 소식도 들렸다. 김성윤(갤러리현대), 우고 론디노네(조각 ‘컬러마운틴’ 조각 연작·국제갤러리), 최형길·임일민(키다리갤러리), 김재용(학고재), 강혜은(맥화랑), 정유미(아뜰리아아키), 고상우(갤러리나우), 로즈 와일리(판화·야리라거갤러리) 등의 작품이다.
‘키아프 서울 2025’ 전경. 백윤조의 대형 회화작품(왼쪽)을 비롯해 마이코 코바야시(오른쪽)·이재현·채지민 등의 회화작품이 걸린 갤러리조은 부스를 관람객들이 둘러보고 있다(사진=이영훈 기자). |
‘키아프 서울 2025’ 전경. 관람객 옆으로 권능의 ‘투 폴리시드 캄(To Polished Calm, 2025)이 걸렸다. 아뜰리에아키에 걸린 이 작품은 마치 지금 서 있는 아트페어 현장을 옮겨놓은 듯한 정밀한 묘사로 관람객들의 눈길을 끌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키아프 서울 2025’ 전경. 한 관람객이 야리라거갤러리에 걸린 갈리나 먼로의 회화작품(오른쪽), 로즈 와일리의 조각·판화작품 등을 바라보며 이동하고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성장했으나…프리즈 전략에 다시 한 수 배우게 된 키아프
‘한번 달려 보자’ 했던 판매질주는 프리즈나 키아프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작품규모를 놓고 볼 땐 격차가 대단히 크다. 사실상 수십∼십수억원에 달하는 고가 작품의 판매는 모두 프리즈에서 이뤄졌다는 얘기다.
올해 ‘키아프리즈’는 키아프가 해외 갤러리를 대거 들이고(175개 중 50개), 프리즈가 국내 갤러리를 대거 들이면서(120개 중 42개) “사실상 평준화해 가는 듯하다”는 얘기가 무성했던 터다. 하지만 뚜껑이 열린 뒤 실적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였다. 국내 대형 갤러리까지 ‘고가의 수작’을 프리즈로 옮겨가며 키아프가 아닌 프리즈 곳간을 풍성하게 채운 형국이 됐으니까.
‘프리즈 서울 2025’ 전경. 단색화 거장 박서보(1931∼2023) 작품을 빛과 색으로 재해석한 ‘박서보×LG OLED TV: 자연에서 빌려온 색’은 아트페어 속 특별전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도입부에 LG OLED TV 97인치 8대로 연출한 T자형 설치작품이 화려하고 단단한 색감으로 관람객의 눈길·발길을 연신 이끌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프리즈 서울 2025’ 전경. 특별전으로 꾸린 ‘박서보×LG OLED TV: 자연에서 빌려온 색’을 찾은 박서보 화백. 생전 모습 그대로 화백의 형상을 빚어놔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왼쪽은 박서보의 ‘묘법 No.020218’을 LG OLED TV 83인치에 담아낸 작품이다. 뒤쪽은 박서보의 작품 ‘묘법 No.990809’(1999, 220×330㎝)을 원작 그대로 걸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갤러리의 ‘양극화 현상’도 두드러졌다. 글로벌 대형 갤러리들이 프리즈에 출품할 작가의 작품으로 국내 미술관·화랑 등에 전시·홍보를 하는 등 ‘선방’을 날렸다고 할까. 결국 눈·귀로 먼저 익힌 유명작가의 ‘신선한 작품’이 판매에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던 셈이다. 62억 6000만원에 팔린 마크 브래드포드의 작품은 사실상 ‘프리즈 서울’이 4년 만에 낸 최고의 성과다. 그 브래드포드 역시 지난달 1일 오픈한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의 개인전으로 대대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더랬다.
‘프리즈 서울 2025’ 전경. 가고시안에 걸린 무라카미 다키시의 대형 회화작품 ‘죽음과 생명의 비밀을 품은 축복받은 사자의 그림’(A Picture of the Blessed Lion Who Nestles with the Secrets of Death and Life, 2014)은 금빛 찬란한 색감과 거대한 규모로 관람객을 끊임없이 불러모았다(사진=이영훈 기자). |
반면 신무기를 장착하지 못한 채 키아프에 참가한 대다수 국내 중소형 갤러리의 경우에는 뚜렷한 실적으로 연결하지 못했다. ‘좀 살아난’ 분위기의 덕을 보는 것 외에는 말이다. 국내 한 갤러리 대표는 “어차피 시장 반응이 있는 작가의 좋은 작품을 들고 나오는 것은 갤러리 각각의 능력”이라면서도 “전체적으로 판매가 늘어났는가는 또 다른 문제”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 3회 동안 공동 개최를 해오며 키아프의 과제는 ‘프리즈와의 체급 차 극복’에 집중됐다. 올해 4회차를 통해 얼추 겉모양은 갖췄으나 역시 속근육이 비슷해지는 것까진 무리였던 듯하다. ‘공진’ 하자며 눈짓을 보냈으나 프리즈는 또 저만큼 달아나버렸다. ‘키아프리즈’의 공동 개최는 이제 계약상 1회를 남기고 있다.
‘프리즈 서울 2025’ 전경. 가족으로 보이는 관람객이 글래드스톤 부스에 걸리고 매달린 아니카 리의 조각·회화작품들을 둘러보며 즐거워하고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