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나라 새 미술: 조선 전기 미술 대전’에 교체 전시됐던 시왕도 10폭 중 5폭 ‘염라왕도’. 최근 일본에서 환수한 시왕도의 최고 명품이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제공 |
600여년 전 조선의 이름 없는 승려 화가가 그린 빛바랜 지옥 그림에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스터’(이하 ‘케데헌’)의 원초적인 잔상들이 스며들어 있었다. 염라대왕과 주변 신하, 궁녀들의 얼굴들이 지옥 곳곳을 수놓고 있었는데, 그 상 위로 애니메이션 속 걸그룹 헌트릭스와 보이그룹 사자 보이즈 멤버들의 얼굴, 그들의 무대 앞에서 환호하는 한국 청중들 얼굴이 겹쳐 지나갔다.
그 올망졸망한 면모들, 모나지 않고 어딘가 넉넉한 여유와 넉살을 담고 있는 후덕하고 풍성한 얼굴들, 그악스럽지 않은 생김새 등이 ‘케데헌’ 등장인물들은 물론이고 오늘날 한국인의 인상과 별 차이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친숙함을 느끼게 했다. 뿔 달린 저승 심판관에게 머리채를 잡혀 이승의 죄를 비춰보는 거울 업경대 앞으로 끌려가는 알몸 망자들의 모습과 그들을 따라가는 닭 같은 날짐승들의 만화 같은 이미지들은 되려 웃음을 머금게 했다. 해학적인 조선 후기 풍속도와 잇닿으면서도 그 시절 조선 정반대편 유럽 화단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초현실주의 화파의 선구자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괴기스럽고 익살스러운 도상 또한 떠올리게 했다.
지난 6월부터 지난달 31일까지 열린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 ‘새 나라 새 미술: 조선 전기 미술 대전’에서 전시 기간 말미에 교체 출품된 조선 초기 불교회화 시왕도 10폭 중 3폭인 염라왕, 변성왕, 평등왕의 그림은 전문가는 물론 관객들의 각별한 관심과 호응을 받았다. 시왕도는 저승에서 차례로 만나 망자를 심판한다는 10명의 왕을 10폭에 나눠 그린 불화들. 일반인은 물론 전문가들에게도 낯설고 드문 조선 초기 불교회화의 세계가 오늘날 한국인의 시각문화, 미의식과도 연결된다는 것을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새 나라 새 미술’전이 열린 지난 두어달 동안 박물관은 역대 최고의 시절을 맞은 것처럼 보인다. ‘케데헌’의 전세계적인 인기를 업고 배경으로 등장하는 전통 시각문화의 도상들이 주목받으면서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문화상품을 판매하는 박물관은 국내외 케이컬처 팬들이 꼭 찾아 봐야 하는 단골 순례지로 떠올랐다. ‘케데헌’ 캐릭터로 등장하는 ‘더피’와 ‘서씨’를 닮은 까치호랑이 굿즈, 곤룡포 타월 등을 사기 위해 아침부터 수백명씩 달려와 박물관 앞 마당에 대기하는 ‘오픈런’이 일상화하는 전례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지난 1월부터 지난달까지 박물관 입장 관객 수는 430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되면서 2023년 기록한 역대 최대 관객(418만명)을 넘어섰고, 올해 500만명 동원 기록을 넘어설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오픈런까지 촉발한 관객들의 폭발적인 급증 현상은 ‘케데헌’ 열풍에 따른 뮤지엄 굿즈를 사려는 목적이 대부분이다. 전시 공간들이 주도적으로 조성한 것은 아니어서 마냥 높이 평가할 수만은 없지만, 낙수효과를 어느 정도 누린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사실 기획전에서 드러난 박물관의 전시 역량은 아쉬움이 적지 않다. ‘새 나라 새 미술’전이 경우 조선이라는 새 나라 시작과 함께 국가와 사대부, 백성이 만들어낸 14~16세기의 조선 전기 미술을 400점 넘는 방대한 회화, 도자기, 불교미술품, 공예품, 고문서 등을 통해 소개하는 대형 전시였다. 다만 전시의 의미와 초점을 명쾌하게 짚어내면서 당대 미술사에 대한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꺼냈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전시 초반부, 분청사기, 백자들을 거대한 진열장에 100점 이상 나열하고 국내에서 볼 수 없는 15~16세기 소상팔경도 등의 관념산수 회화들과 희귀 불화들을 국외 소장처에서 다수 대여해 고려 미술보다 실체감이 부족했던 조선 전기 미술의 실체를 보여주려 애썼다. 몰랐던 수작들을 전세계 미술관과 국내외 컬렉션을 수소문해 보여준다는 취지였으나, 다분히 한자리에 많이 모아 보여준다는 데 치중한 느낌이다. 화원풍의 관념산수화는 아직도 조선·중국 국적 논란이 있고 그린 배경 등도 제대로 연구되지 않아 나열식으로 내보일 수밖에 없다. 연구가 진척된 뒤 전시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백미는 시왕도로 대표되는 조선 전기의 왕실 후원 불교회화와 고려시대의 정교한 유풍이 남은 크고 작은 소조, 금속 불상들이다. 유려한 선묘로 그린 조선 초 왕실 발원의 보살도와 영산회상도 등의 그림은 숭유억불의 도식이 조선 초에 적용될 수 없음을 웅변한다. 기림사의 보살좌상, 조계사 상 등 박물관에서 볼 수 없었던 불상들이 처음 나왔고, 한글로 풀어 대중에 보급한 불경들이 있는가 하면, 고려시대 사경에 결코 뒤지지 않는 정묘한 조선 초 사경들의 존재 앞에서 당대 불교미술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조선 전기 불교미술만으로 따로 주제를 잡아 먼저 전시로 풀었어야 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방대한 출품 대여 유물에 비해 조선 전기 미술에 대한 내실 있는 담론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울 수 없다. 전통 시각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지금, 보기 힘든 것들을 모아서 보여주는 것만 의식할 것이 아니라 소장품에 대한 연구 역량 강화와 전시 큐레이팅에 대한 새로운 성찰도 필요한 시점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 후원하기] 시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민주주의, 필사적으로 지키는 방법 [책 보러가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