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
누가 내 뒤를 밟는 걸까.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발걸음을 재촉해 모퉁이를 돌아 몸을 낮추었다. 하전이 빠른 걸음으로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하전의 뒤로 대동강과 평양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날씨는 매섭게 차가웠다. 3월에 들어 조금씩 녹고 있던 강물은 때늦은 한파로 다시 꽁꽁 얼어붙었다. 이 추위에도 대동교 위로 물건을 나르는 일꾼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하얀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은 여고생들이 책가방을 든 채 고개를 강 쪽으로 내밀고 썰매 타는 아이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평양 시내 모습이 많이 변했지? 일본 간판이 눈에 띄게 많아지기도 했고.”
어느새 다가온 하전이 내 마음을 읽은 듯 말했다.
청류정으로 오르는 길은 가팔랐다. 오늘 모임 장소를 급히 이곳으로 변경한 건 구섭이였다. 이렇게 추운 날에 평양성 내성에까지 오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 남의 눈을 피하기 좋을 거라 구섭은 확신했다. 지난달 하전의 집에서 모임이 있던 날, 순찰하던 일본 순사와 맞닥뜨린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거기, 학생들 딱 서라! 어디 비밀 회동이라도 다녀오는 길인가?”
순사는 장난 같기도 하고 놀리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로 구섭과 나를 불러 세웠다. 너무 무서워서 오줌을 지릴 것 같던 나와는 달리 구섭은 의연했다.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는 독서 모임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구섭은 가방에서 백석의 시집 《사슴》을 꺼내 순사에게 보여주었다. 순사는 부주의하게 책을 뒤적거렸다. 나도 하전에게 빌린 이광수의 《흙》을 꺼내 보이며 손을 덜덜 떨었다. 평양 경찰서는 독립운동가 색출을 위해 학교에까지 프락치를 심어두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밀고라도 했을까? 순사에게 놓여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몇몇 의심 가는 얼굴들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비밀 결사대가 발각되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리되면 우리와 연결된 조직들과 가족들까지 무사하지 못할 것이었다. 숭인상업학교 여섯 학우들의 비밀 결사대 ‘독서회’는 두 달 만에 ‘축산계’로 개명했다. 좀 더 완벽하게 위장할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어서 가자! 구섭이 기다리겠다.”
오늘따라 하전이 걸음을 재촉했다. 아무래도 구섭이 챙겨 오기로 한 물건 때문인 듯했다. 우리는 숨이 목에 차오를 때까지 언덕을 뛰어올랐다. 청류정에 도착했을 때 구섭은 ‘축산계’라 적힌 가짜 회의록을 앞에 두고 기둥에 기대앉아 색이 고운 단청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곧이어 동지들이 속속 도착했다.
학교 조회 때마다 억지로 암송하던 일제의 ‘황국신민서사’ 대신 우리의 다짐을 새겨 넣은 결의문 ‘오등의 서사’를 낮지만 단호한 음성으로 암송했다. 처음 결의문을 만들었을 때 문서로 남겨두는 건 위험하니 외워서 머릿속에 새기자고 하전이 제안했다. 모두 단번에 외웠다. 그 속엔 우리의 염원이며, 모임의 목표가 간명하게 들어 있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동시에 구하자!”
“우리는 우리 민족을 위해 혁명아가 되자!”
“우리는 무실역행하며 독립 성취에 매진하자!”
암송을 끝내자, 구섭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어 만주를 거쳐 들어온 <신한민보>를 모두 들을 수 있도록 읽었다. 1930년 3월 13일 자에 실린,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한 격문이었다. 우리도 조국 독립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해! 격문을 들은 하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동지들도 주먹을 쥐어 보이며 하전과 뜻을 함께했다.
비밀 결사대를 만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독립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막연하기만 했다. 1921년, 내가 태어났을 때 조국은 이미 일본의 식민지였다. 나는 단 한순간도 독립된 나라에 살아본 적이 없었다. 살아본 적이 없는 나라를 상상하는 건 쉽지 않았다. 사랑이나 행복처럼 달콤하지만 애매모호한 이름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결사대가 조직된 후 우리는 매달 만났다. 일제에 의해 우리 국민이 경제와 정치와 개인의 삶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차별과 압박과 착취를 당하고 있는가 공부하고 토론했다.
“가져왔어?”
구섭을 바라보는 하전의 눈빛이 빛났다. 구섭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한지에 곱게 싼 종이를 꺼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셔!”
구섭은 동지들이 보기 좋게 사진을 기둥에 기대 세웠다. 하전의 얼굴은 금세 붉게 상기되었다. 사진 속 남자는 하얀 셔츠에 검은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고, 짧은 머리를 기름 발라 양쪽으로 빗어 넘긴 모던 보이였다. 형형한 눈빛은 강직해 보였고 입가엔 살짝 미소가 어려 온화해 보였다.
“그날 뵙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한이 되었다.”
하전은 눈시울을 붉혔다. 두 해 전 구섭과 하전과 나는 강서의 대보산으로 선생을 뵈러 갔다. 우리는 송태 산장이 내려다보이는 덤불 아래 몸을 숨기고, 산장으로 오가는 이들을 검문하는 일본 순사들이 돌아가기만을 기다렸다. 하얀 옷을 입고 산장의 마루에 걸터앉은 선생의 실루엣을 보았지만, 순사가 무서워 다가갈 수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순사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날이 어둑해지니 산짐승이 무서웠다. 다른 날 꼭 다시 오자! 우리는 다짐하며 산장 뒤편을 돌아 산에서 내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는 선생을 다시 서대문 형무소에 가두었다.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들은 날 우리는 주먹이 피가 나도록 땅을 치며 통곡했다.
“다들 알지? 오늘이 3월 10일,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딱 1년이 되는 날이야!”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겠다던 선생의 원대한 꿈은 미완인 채로 사그라졌다. 선생이 이루지 못한 조국 독립의 꿈을 우리가 이어받기로 다짐했다. 함석헌 선생을 찾아가 구체적인 운동 방향을 지도받았다. 도산 선생의 사상과 삶의 궤적은 곧 우리의 삶의 목표가 되었다. 그 첫 출발이 ‘독서회’라는 비밀 결사대였다.
“도산 선생이 태평양을 몇 번이나 건너며 독립 자금을 모금하지 못했다면, 임시정부는 생기지 못했을 수도 있어. 군자금이 없이는 타국에 젓가락 하나도 꽂을 수 없었을 테니까. 우리는 반드시 선생의 뒤를 따라야 해.”
“하전이 네 말은 군자금을 모금하자는 말이지? 근데 우리는 아직 학생인데 어떻게 돈을 마련하겠나. 차라리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이 되는 게 더 쉬울 것 같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이 큰돈이 된다고 들었네.”
“조국이 식민지의 운명인데 공부는 해서 뭘 하겠나. 나는 당장 상하이로 가겠네.”
좌절과 혼돈에 휩싸인 동지들이 한꺼번에 말을 쏟아냈다.
“한 알의 오렌지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독립운동이다! 안창호 선생이 그리 말씀하셨다. 상하이나 미국으로 가서 독립운동하는 건 학생 신분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오렌지를 어떻게 정성껏 딸지를 고민하자.”
하전이 봉투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봉투 속에는 8원이 들어 있었다. 오늘 밤 상하이로 가는 동지 편에 보낼 군자금이라고 했다.
“근데… 오렌지가 뭐니? 오렌지가 땅에서 나는 거야? 나무에 열리는 거야? 너희들은 오렌지를 본 적이 있어?”
구섭이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껍질이 두껍고 달면서 신맛이 나는 커다란 밀감이라고 들었어.”
하전의 설명을 들으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오렌지의 단맛이 입에 고이는 듯했다.
“오렌지를 정성껏 따는 건 실력을 키우는 거라고 나는 생각하네.”
그러기 위해서 하전은 졸업하면 곧장 일본으로 공부하러 떠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새벽 생선 배달을 해서 군자금에 보태겠다고 말했다. 구섭은 야학에서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치겠다고 했다. 주변 친구들에게 독립이 무엇인지, 왜 독립을 해야 하는지 성심껏 설명하겠다는 동지도 있었다.
우리가 각자의 오렌지를 정성껏 딸 방도를 토론하는 동안, 사진 속 도산 선생이 우리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1938년 평양 숭인상업학교 재학 중 조선 독립을 목표로 하는 비밀 결사 ‘축산계‘를 조직했다. 독립 정신 함양을 담은 ’오등의 서사‘라는 결의문을 작성하고, 안창호 선생의 업적을 기리며 자금을 출연했다.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미국에 거주 중이다.
200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메모리얼 가든>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통영>, 산문집 <나는 바다를 닮아서> 등이 있다. 재외 동포 문학상 대상, 김승옥 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경남 통영 출생으로 캐나다에 거주 중이다.
공동기획: 조선일보·국가보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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