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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에서 찾은 나다움”···폭식증 이겨내고 두 번째 인생 준비하는 ‘포미닛’ 허가윤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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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대 걸그룹 ‘포미닛’ 메인보컬 허가윤이 털어놓은 회복에 관한 이야기
평가 받는 삶에서 벗어나 발리에서 숨통 틘 사연 담은 책 출간
허가윤 제공

허가윤 제공


허가윤은 오후 3시 정각,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연습생 시절부터 몸에 밴 철저한 자기 관리의 감각은 무뎌지지도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로 시작하는 노래 제목은? 세대 구별 퀴즈에 단골로 나올 정도로 인기를 모은 ‘핫이슈’의 ‘포미닛’ 출신 허가윤이 에세이 <장 낯선 바다에서 장 나다워졌다>를 내놓았다. 티저 영상 노출, 뮤직비디오 공개, 첫 음방(음악방송) 등등으로 요란한 수순을 거쳤던 신곡 발 표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단출한 ‘신간 출간’을 처음 경험한 신인 작가는 “워낙 스펙터클한 곳에 있어서였는지, (출간이) 처음엔 크게 실감나지 않더라”며 건강하게 그을린 얼굴로 웃었다.

허가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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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가윤의 글은 도입부에서 ‘그날의 기억’을 되짚는다. 2020년 말 하나뿐인 오빠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깊은 슬픔에 빠졌던 그는 그 일을 계기로 “사소한 것이든, 큰 것이든 미루지 말자”는 결심을 하고 발리행을 실행에 옮긴다. 그곳에서는 아이돌 멤버였던 허가윤이 아니라 그냥 한국에서 온 여자 사람 ‘가가(Gaga)’로 살기로 했지만, “형제가 어떻게 되세요? 왜 발리에 왔어요?”라는 질문에는 곧잘 말문이 막혔다.

그는 “솔직해지고 싶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집필 배경은 형의 투병과 죽음을 겪은 뒤 삶의 의욕을 잃었다가 두 번째 인생에 들어선 패트릭 브링리의 베스트셀러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를 연상케 했다. 서핑 보드에 올라 부서지는 파도를 거스르는 사진으로 덮인 책 표지를 보고는 ‘허가윤에게는 발리의 바다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었겠구나’ 섣부른 짐작도 했다. 하지만 책은 푸르른 바다보다 검푸른 심연을 담고 있었다.

허가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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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분들도 (그 채널을) 잘 모른다고 했는데, 제가 나가겠다고 했어요. 그 병을 앓는 많은 분이 예전의 저처럼 몰래 정보를 찾고 있을 것 같아서요. 저도 아무에게 말 못하고 병원에 가기까지 몇 년이 걸렸으니까요. 누군가에게 힘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책을 썼거든요.”


허가윤은 이번 책에 수년간 고통받은 강박증, 불면증, 식이장애 경험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책을 내놓기 무섭게 스포츠 영양사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출연을 자청했다. ‘폭식증 아이돌과 거식증 영양사의 식이장애 극복기’라는 제목을 단 콘텐츠에는 ‘힘과 위로가 되었다’는 댓글이 이어졌다. 그의 책은 과거의 허가윤처럼 쉴 줄 모르고 자신을 채찍질하는 이들에게 바치는 조언이자 격려다.

돌이켜보면 거의 5년간 제대로 자본 기억이 없다고 했다. OTT, 유튜브 등을 보며 밤을 새우다 폭식을 했다. 배달 앱조차 써본 적 없는 왕년 아이돌은 편의점을 돌며 먹을 것을 사들였다. 앉은자리에서 아이스크림 12개 먹기는 우스웠다. 과자, 빵, 도시락 등등 사정없이 먹어 치웠다. 스스로 제어가 안 돼 울면서도 먹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식이장애로 침샘이 비대해져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다. 그러다 다이어트 강박에 기력이 다할 때까지 운동을 했다. 사람들 눈을 피해 한밤중에 한강변을 뛰었다. 헬스장에서 날이 밝는 걸 보고 무기력에 빠졌다가 다시 폭식. 악순환이 계속됐다.


허가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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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얘기를 쓴다는 게 처음엔 너무 어려웠어요. 모든 걸 오픈할 수 없는 직업이었잖아요. 100% 정제된 내용만 써야 할 것 같아서 썼다 지우고… 계속 스스로 검열하는 거예요. 연습생 때부터 허가윤이라는 사람에 관해서 얘기할 기회는 별로 없었잖아요. 우린 ‘콘셉트’로 만들어진 팀이었으니까요.”


3대 연예기획사는 물론 중소 기획사로부터 대거 육성된 2세대 아이돌은 2000년대 중반 이후 K팝의 대중화를 위해 ‘열일’한 산업 역군이었다. 세분된 팀 내 포지션에 따른 기본기는 필수, 각종 예능 프로그램을 섭렵하는 개인기까지 갖춰야 했다. 이 시기 아이돌들이 유수의 연예기획사 빌딩 너덧 층은 지었다는 건 ‘업계의 정설’로 통한다. ‘메인보컬’ 허가윤은 “데뷔 후 처음 만들었던 여권은 눈 깜짝할 사이에 페이지가 가득 찼고, 새로운 여권을 만든다는 설렘조차 없이 그저 구청에 가자니 따라갔던 기억만 남아 있다. 스케줄이 끝나면 다시 연습, 그리고 녹음”이라고 그 시절을 기록했다.

문자 그대로 “머리만 대면 잠들었던” 7년의 ‘포미닛’ 활동을 마치고 그는 신인 배우로 오디션에 나섰다. 아이돌 이력이 연기 활동의 프리미엄으로 통하는 요즘과 달리 당시만 해도 “아이돌 출신이라 상대 배우가 싫대요”라는 캐스팅 불발 소식을 심심찮게 들었다. 그 무렵 불면증이 찾아왔다. 그는 그 시기를 “겉만 번지르르한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고 표현했다. 자가면역질환인 류머티즘 혈관염과 갑상선 저하증 진단도 받았다. 잠 한숨이 간절하던 2023년 초 ‘포미닛’을 함께했던 전지윤이 발리 여행을 권했다.

“발리에서 3일째 문득 깨고 보니 제가 잠을 잤더라고요. 밖에서 누굴 만나도 빨리 집에 가서 먹어야겠다는 생각만 간절했는데, 발리에서는 그냥 쭉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허가윤 제공

허가윤 제공


1년간 받은 병원 치료보다 발리가 특효였다. 혼자 여행은커녕 식당에서 ‘혼밥’도 못하던 그는 2년 전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홀로 짐을 쌌다. 발리에서 잠을 잘 수 있게 되자, 폭식증이 나아졌다. 정상적으로 식사를 하면서부터 운동에 대한 강박도 내려놓을 수 있게 됐다. 그는 서핑과 다이빙을 하고, 인도네시아어를 익히면서 발리 곳곳을 돌며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허가윤은 소속사 매니저들 사이에서도 ‘바른 생활자’로 꼽힐 정도로 엄격한 기준을 세우고 살았다. 14세 때에 연습생이 됐지만 우상이었던 ‘보아 선배’처럼 13세에 데뷔하지 못한 것을 실패로 여길 정도였다. 한번 학폭에 휘말렸을 때도 일절 맞서지 않고 “교정기 끼고 있으니까 입주변만 때리지 말아달라”며 버텼다. 가수가 될 거니까 절대 문제를 일으키면 안 됐다.

“어릴 때부터 항상 평가받는 삶을 살다 보니 눈치를 진짜 많이 봤거든요. 말과 행동을 하기 전에는 항상 회로를 한번 돌렸는데, 발리에서는 그럴 ‘의무’가 없어요. 내가 누군지 모르는 곳이 제게 상상력을 준 것 같아요.”


경제적으로 여유 있으니 쉬러 갔느냐는 얘기도 들었다. 지금처럼 ‘공항 패션’이 상업화되기 전 패션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공항 패션이라는 용어를 업계에 끌고 올 정도로 트렌드에 민감했던 그는 그나마 발리에 싸 왔던 옷과 신발도 나누거나, 정리했다. 하루 1만원이면 살 수 있고, 자외선차단제면 족하고, 뭘 입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삶의 감각이 그의 숨통을 틔웠다.


현지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라든가, 즐겨 먹는 음식에 대한 정보가 있긴 하지만 누구라도 ‘자아’를 찾을 수 있는 곳으로 발리가 비치는 것은 경계했다. 내 삶의 리듬을 회복할 수 있는 공간이 누군가에는 강원도거나, 도서관이거나, 동네 강변일 수도 있다. “미안해, 고마워”를 입에 달고 사는 그에게 발리 친구들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일깨워줬다. “산타이(Santai, 긴장 풀고 여유를 가져)”하라는 서핑 코치들의 조언은 삶의 길잡이가 됐다. 연습생 시절부터 몸에 강제된 강박을 떨쳐낼 수 있었던 곳이 그에겐 발리였다. 그는 “권리를 찾은 느낌”이라고 했다.

허가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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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꿈이 많아졌어요. 한국에서는 내가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나 항상 걱정과 고민을 했다면, 지금은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져서 이 중 뭘 해야 할까 하나씩 찾아가는 재미가 있어요.”


아이스커피의 얼음이 다 녹을 동안, 허가윤과 꽤 다양한 ‘미래 아이템’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밝아진 표정만큼이나 넓어진 시각이 보였다.

“이제는 내가 만들고 내가 완성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지, 누군가의 결과물이 되고 싶지 않아요.”

책 홍보 일정을 마친 그는 이달 초 “얼굴이 왜 그리 탔어?” “나이가 몇 살이지?” 같은 질문 따위 없는 발리의 집으로 돌아간다. 우리의 다음 인터뷰는 ‘그 아이템’과 관련된 것일 거라고 의지를 다졌다.

장회정 선임기자 long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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