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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비트는 기만적 ‘이중화법’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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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스피크 l 윌리엄 러츠 지음, 유강은 옮김, 교양인, 2만4000원

더블스피크 l 윌리엄 러츠 지음, 유강은 옮김, 교양인, 2만4000원


우리는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표현한다. 영어권도 “passed away”로 똑같다. 용변을 보러 “화장실에 간다”거나, 성관계를 “같이 잔다”고 에둘러 말한다. 불쾌하거나 혐오스러운 상황의 직설을 꺼리고 상대의 감정을 보호하며 사회적 금기를 존중하는 완곡어법이다. 이런 완곡어법은 아무도 오해하지 않고 본뜻을 알아듣는다. 그러나 듣는 이를 오도·기만하려는 의도로 모호하게 말하는 경우도 있다. 진실을 비틀고 가리는 거짓 언어, 이른바 ‘이중화법’이다.



미국 영문학자 윌리엄 러츠의 1989년 저작 ‘더블스피크(원제=doublespeak)’는 언어가 진실을 감추고 대중을 속이며 권력을 미화하는 실태를 분석하고 위험성을 경고한 고전이다. 이때 권력은 정권·관료·자본뿐 아니라 의료·교육 등 공공서비스 전반을 아우른다. 대중은 납세자이자 소비자이며 주권자인 시민이다.



국내에는 36년이 지나서야 첫 번역본이 나왔다. 많이 늦은 감이 있다. 하지만 지금도 ‘가짜뉴스’(불편한 진실), ‘대안적 사실’(사실이 아닌 주장), ‘계몽령’(불법 계엄령), ‘저항권’(폭동)처럼 기상천외하고 뻔뻔한 이중언어들이 쏟아진다. 긴가민가 의심스러운 말들의 홍수 속에서 진실을 분별하는 통찰력을 준다는 점에서 책의 가치와 쓸모는 여전히 오롯하다.



뭔가를 감추거나 반대로 잘 보이고 싶을수록, 이중어법은 더 많아지고 교묘해진다. 부수적 피해(전시 민간인 사망), 향상된 심문 기법(고문), 구조 조정(강제해고, 자회사 매각), 세입 증대(세금 인상), 종군 위안부(일본군 성노예), 특별군사작전(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그 목록은 끝이 없다.



이중어법은 “소통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는 텅 빈 언어,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불쾌한 것을 매력적으로 둔갑”시키고 “책임을 회피하거나 떠넘기는” 왜곡된 기표다. 그중에는 우스꽝스러운 것도 많다. 예컨대, 패리티 상품(휘발유·치약·감기약·화장품처럼 브랜드와 상관없이 기능과 품질에 별 차이가 없는 제품) 광고에서 “더 좋은(better)”이 아니라 “최고(best)”라고 주장하는 것은 구체적 비교우위를 말하지 않는다. 제조사에는 부담이 없지만 소비자에게는 다 똑같다는 과장일 뿐이다.



정치인들은 아이디어가 없거나 불확실한 상황을 “프로세스(process·과정)”라는 말로 얼버무린다. ‘평화 프로세스’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그 표현이 점차 빛을 잃자, 의미는 없지만 멋져 보이는 다른 단어를 찾아냈다. 바로 ‘이니셔티브(initiative·구상)’이다. 전략방위 이니셔티브, 초전도체 이니셔티브, 청소년 교류 이니셔티브…! 그러나 이니셔티브는 시작만 될 뿐 완료되는 법이 없다.



이중어법은 단순한 말장난이나 수사가 아니라 대중의 판단력을 마비시킨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이중화법은 결코 부주의하거나 게으른 사고의 산물이 아니라, (사람들이) 진실에서 멀어지도록(…) 현실을 왜곡하고 생각을 오염시키기 위해 치밀하게 고안된 말”이다. 중대한 안보 현안이나 정치적 결정, 공공정책 분야일수록 그 함정은 깊고 어둡다.



지은이는 2015년 새로 쓴 머리말에서 “시간이 지났어도 이 책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다. (…) 인용한 말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아야 이중화법이 얼마나 기만적이고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지, 우리의 사고와 공적 담론을 더럽히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썼다. 다시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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