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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도움받지 않을 권리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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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 올랜도의 디즈니월드에 다녀왔다. 동심을 자극하는 캐릭터들, 미래를 꿈꾸게 하는 불꽃놀이,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어우러진 풍경까지, 설렘의 연속이었다. 그중 가장 반가웠던 것은 휠체어를 탄 사람들도 큰 어려움 없이 이 공간을 함께 즐긴다는 점이었다. 엎드린 자세로 타야 하는 롤러코스터에도 휠체어 이용자를 위해 개조된 칸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 디즈니월드로 가는 셔틀버스를 탈 때면 기사님은 언제나 휠체어에 탄 손님들 자리를 먼저 마련했고, 줄을 서서 기다리던 승객들은 이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문화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닐 테다. 1992년부터 시행된 ‘미국장애인법’은 대중교통과 공공시설 이용 시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도록 이들의 이동권과 접근권을 보장하고 있다. 실로 미국에는 어떤 건물이든 대체로 출입문 자동 개방 버튼이 있었다. 허리쯤 오는 낮은 위치에 있는 그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아무리 두껍고 무거운 문이라도 활짝 열렸다. 보도블록이나 식당 출입구에도 턱이 없었고, 마트의 셀프 계산대 역시 휠체어를 탄 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낮게 설치돼 있었다.

국가끼리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장애인 이동권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한국의 사정이 떠올라서 심란해지기도 했다. 현재 한국에서는 장애인이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지극히 기본적인 권리에 대한 요구조차 관철되지 않고 있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타려고 해도 장애인 손님을 거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안전성이 떨어지는 지하철 휠체어용 리프트의 경우, 이를 이용하다 추락사한 사례도 적지 않다. 그러나 지하철역마다 승강기를 설치하는 일은 거부되고 미뤄지고 있다. 그런 맥락을 환기하고 보니, 장애인에게 이동할 권리뿐만 아니라 유원지에서 즐거움을 누릴 권리까지 마땅히 보장하는 미국 사회가 유달리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나 역시 대학교 신입생 시절, 발을 다쳐 한 달간 휠체어를 탄 경험이 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의 4층 강의실에는 혼자서 갈 수가 없어서 동기들이 번갈아 업어줘야만 했다. 살고 있던 기숙사에 들어갈 때도, 이사 때만 개방되는 넓은 출입문을 열려면 매번 경비원의 도움을 구해야 했다. 주변의 도움은 언제나 고마웠지만, 늘 도움을 요청하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건 너무나 난감한 일이었다. 나에게는 찰나였던 그 불편함을, 누군가는 일상에서 내내 겪을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백진이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가 만든 궤적>을 보았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휠체어를 탄 ‘진이’는 카페 키오스크 상단의 메뉴 변경 칸을 누르려고 팔을 뻗지만, 손이 닿지 않는다. 영화의 배경이 된 카페는 내가 일주일에 세 번은 들르는 곳인데도 낯설게만 느껴졌다. 카페에서 원하는 음료를 주문하는 일마저 타인의 도움을 받게끔 만들어두다니, 걸을 수 있는 사람만을 기준으로 삼는 사회에 이렇게나 익숙하다니 절망스러웠다.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툭 부서진 것만 같았다.

장애를 가진다는 것이 그 이상의 부정적 의미를 지니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 사회는 장애를 지닌 이들을 더 취약하게 만들고 있다. 휠체어를 타더라도 학교에 가고, 마트에서 장을 보고, 놀이공원에 놀러 갈 수 있다. 그 모든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에서는 그 일상적인 일들이 너무나 어렵다. 턱이 있는 길목마다, 손이 닿지 않는 키오스크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지하철역의 층계마다 멈춰서 도와달라고 외치게 만든다. 도움을 주고받는 일 자체는 아름다운 것이나, 매번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자리에 머물게 하는 건 잔인한 폭력에 가깝다.


장애를 지닌 이들 역시 도움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까지 빼앗아 무력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성현아 문학평론가

성현아 문학평론가

성현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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