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통탄 친나왓 태국 총리가 지난달 29일 태국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임되면서, 태국 정치 명문가 탁신 가문의 ‘총리 잔혹사’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패통탄은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딸로, 탁신 가족이 배출한 네 번째 총리였다. 하지만 패통탄의 아버지와 고모부, 고모가 그랬던 것처럼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실각하게 됐다. 한 가문에서 총리를 4명이나 배출한 것도 이례적이지만, 이들이 전부 군 쿠데타나 헌법재판소 판결에 의해 쫓겨난 것도 보기 드문 일이다. 이는 강력한 지지 기반을 가진 탁신 가문과 태국 군부 및 왕실 간의 오래된 대립 구도에서 비롯된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워싱턴포스트는 “헌재가 또다시 탁신 세력을 겨냥했고, 사법 쿠데타가 반복됐다”고 보도했다.
패통탄이 해임된 건 태국 최연소 총리로 취임한 지 1년 만이다. 그는 지난 6월 캄보디아와 국경 충돌이 격화된 상황에서 훈센 캄보디아 전 총리에게 전화로 자국 군을 험담한 사실이 알려져 위기에 몰렸고, 태국 헌재 재판관 9명 중 6명이 해임에 찬성했다. 이로써 패통탄은 임기 도중 실각한 탁신가 출신 네 번째 총리가 됐다.
가문의 수장인 아버지 탁신은 압도적인 국민 지지를 기반으로 2001년 총리로 선출된 뒤 2005년 재선에 성공했다. 이후 2006년 조기 총선을 강행했으나 야당이 선거 보이콧을 선언하면서 몰락의 길에 들게 됐다. 당시 그가 대표로 있는 ‘타이락타이당(태국을 사랑하는 당)’이 하원 500석 중 460석을 확보했지만, 헌재는 다수당의 폭거라며 선거 무효 판결을 내렸다. 판결 직후 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다. 2008년 총리가 된 탁신의 매제(여동생의 남편) 솜차이 웡사왓은 헌재의 여당 해산 판결과 함께 3개월 만에 총리직을 잃었다. 탁신의 여동생 잉락은 2011년 태국 최초의 여성 총리로 부임했으나, 2014년 헌재가 인사권을 남용했다는 이유로 해임을 선고했고, 직후 군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처럼 헌재 판결과 군부 개입이 이어지면서 탁신 정권은 단 한 차례도 온전한 임기를 채운 적이 없다.
패통탄이 해임된 건 태국 최연소 총리로 취임한 지 1년 만이다. 그는 지난 6월 캄보디아와 국경 충돌이 격화된 상황에서 훈센 캄보디아 전 총리에게 전화로 자국 군을 험담한 사실이 알려져 위기에 몰렸고, 태국 헌재 재판관 9명 중 6명이 해임에 찬성했다. 이로써 패통탄은 임기 도중 실각한 탁신가 출신 네 번째 총리가 됐다.
그래픽=박상훈 |
가문의 수장인 아버지 탁신은 압도적인 국민 지지를 기반으로 2001년 총리로 선출된 뒤 2005년 재선에 성공했다. 이후 2006년 조기 총선을 강행했으나 야당이 선거 보이콧을 선언하면서 몰락의 길에 들게 됐다. 당시 그가 대표로 있는 ‘타이락타이당(태국을 사랑하는 당)’이 하원 500석 중 460석을 확보했지만, 헌재는 다수당의 폭거라며 선거 무효 판결을 내렸다. 판결 직후 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다. 2008년 총리가 된 탁신의 매제(여동생의 남편) 솜차이 웡사왓은 헌재의 여당 해산 판결과 함께 3개월 만에 총리직을 잃었다. 탁신의 여동생 잉락은 2011년 태국 최초의 여성 총리로 부임했으나, 2014년 헌재가 인사권을 남용했다는 이유로 해임을 선고했고, 직후 군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처럼 헌재 판결과 군부 개입이 이어지면서 탁신 정권은 단 한 차례도 온전한 임기를 채운 적이 없다.
탁신은 화교 출신 통신 재벌이지만, 고향 치앙마이를 포함한 북부와 동북부 농촌, 도시 빈민을 기반으로 포퓰리즘 정책을 펼쳐 압도적 지지를 얻어 왔다. 2001년 첫 총리 취임 후 서민들의 의료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여준 ’30바트(1000원) 의료보험‘을 비롯해 쌀값 보조, 농민 부채 경감, 마을 기금 지원 정책을 폈다. 하지만 탁신 정권은 방콕과 남부를 기반으로 한 군부와 보수 엘리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언론 탄압, 부정 부패, 권력 남용 문제가 지속 제기됐다.
이에 따라 태국 사회는 옐로셔츠와 레드셔츠로 분열됐다. 옐로셔츠는 방콕 중산층을 기반으로 한 반탁신·친군부·친왕실 세력이고, 레드셔츠는 농민·빈민층이 중심으로 탁신의 복지 정책을 지지했다. 자신들이 선출한 총리가 잇따라 축출되자 레드셔츠는 시위에 나섰고 여러 차례 유혈 진압을 겪었다. 가디언은 “반복된 축출로 탁신 세력이 체제 불신과 항거 의지를 굳혔다”고 분석했다. 잇따른 친탁신계 총리들의 실각이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른 친탁신 인물들을 권좌로 올리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권력의 거수기’로 자리 잡은 헌재도 정치 혼란의 원인이 되고 있다. 재판관 9명은 국왕이 임명하는데, 추천권은 상원에 있다. 상원 250석은 2017년 군부 주도의 개헌으로 전원이 군부 지명 인사들로 채워진다. 국왕은 임명장을 수여하지만 실제 인사권은 군부가 쥔 셈이다. 그렇다 보니 재판관 대다수가 친왕실·군부일 수밖에 없다. 태국 헌법은 ‘군주를 국가원수로 하는 민주주의 체제를 훼손’하거나 ‘헌법이 인정하지 않는 방법으로 권력을 취득’할 경우 정당 해산을 허용한다. 헌재는 이를 근거로 탁신 세력의 집권을 반복적으로 막아왔다. 학자들은 이를 ‘똘라칸피왓(사법적 적극주의)’이라고 부른다.
1932년 입헌군주제 전환 이후 12차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 역시 정국 불안과 국경 분쟁을 정치 개입의 명분으로 삼아왔다. 실제로 최근 캄보디아와의 국경 충돌에서 군부가 강경 대응에 나선 것이 2006년(탁신 실각), 2014년(잉락 실각) 직전 상황과 유사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두 경우 모두 군부는 “국익을 팔아먹었다”는 프레임을 씌워 쿠데타를 정당화했다. 다만 라마 10세 국왕이 2019년 이후 쿠데타 핵심 부대 지휘권을 직접 장악하면서 군부 단독 행동은 쉽지 않다는 전망도 있다.
탁신 가문에서 더 이상 내세울 인물이 없다는 관측도 있다. 아버지를 이어 사업을 하고 있는 장남 판통탄은 정계 입문 뜻이 없다고 밝혔고, 탁신의 첫째 여동생 야오왓파와 그 딸 친니차는 과거 정치 활동 정지 처분을 받은 전력이 있다. 패통탄이 해임된 같은 날 탁신은 왕실모독죄 무죄 판결을 받아 그가 재등판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다. 하지만 사면 당시 왕실에 ‘정치 불개입’을 약속한 바 있고, 74세라는 나이도 걸림돌이라 재등판 가능성은 낮다는 평가다. 전문가들은 향후 친나왓 가문의 영향력이 약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차기 총리 후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당 프어타이당은 잉락 정권에서 법무장관을 지낸 차이카셈 니티시리를 후보로 내세웠다. 중도 성향 야당인 부뭄짜이타이당 아누틴 찬위라꾼 대표는 “4개월 내 의회 해산”을 공약하며 의원 포섭에 나섰다. 부동산 재벌 2세 출신인 아누틴은 코로나 당시 보건장관으로 대마 합법화를 주도했다. 중도 성향으로 군부와 탁신 세력 모두와 협상이 가능하다는 평가다. 태국 총리는 상·하원 합동 750표 가운데 376표 이상을 얻어야 한다. 상원 250석이 군부 지명 인사들로 채워져 있어 차기 총리 자리에 오르려면 군부와의 타협이 필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