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오페라 연출가 요나 김이 각색·연출한 국립창극단 ‘심청’은 순종과 효심의 상징이던 심청의 서사를 일방적 희생을 강요당한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로 전복시킨다. 주역 심청에 더블 캐스팅된 소리꾼 배우 김율희(왼쪽)와 김우정. /장련성 기자 |
오는 3일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개막하는 국립창극단 ‘심청’은 파격 그 자체다. 더 이상 일방적으로 희생하고 순종하는 심청은 없다. 이제는 갈등하고 분노하는 심청, 시대의 폭력에 희생을 강요당한 약자들을 대신해 말하는 심청이다. 지난달 전주세계소리축제 초연에 이어 서울 공연도 전 회 전석 매진. 주역 심청을 맡은 두 소리꾼 배우 김율희와 김우정은 “그동안 심청가를 부르며 답답했던 마음이 풀려 속 시원했다”며 웃었다.
김율희는 판소리 다섯 바탕 중 세 바탕을 완창했고, 창작 집단 ‘우리소리 바라지’와 함께 다양한 창극 무대에 올라온 스타 소리꾼. 국립창극단 단원 김우정은 2020년 창극 ‘춘향’ 주역으로 신데렐라처럼 데뷔한 뒤, 이듬해 창극단에 입단해 주요 작품 주역을 도맡아 왔다. 인터뷰를 두 사람의 대화로 재구성했다.
◇‘효녀 심청’의 굴레를 넘어
살아남기 위해 도망쳤다가 뱃사람들에게 다시 붙잡혀 온 ‘심청’(김우정)은 온몸이 칭칭 묶인 채 인당수에 산 제물로 던져지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당당하게 노래한다. 마치 ‘당신들이 눈감았던 폭력에 희생되는 나를 지켜보라’고 외치는 듯이. /전주세계소리축제 |
김율희(이하 율희) “기존 판소리와 전혀 달라서 호불호가 크게 갈릴 것 같았어요. 전통에 오래 몸담으신 분들은 낯설어하실 테니까. 그래도 많은 관객이 새로운 해석에 공감해 주실 거라 생각했고.”
김우정(이하 우정) “언니, 전 사실 연습할 때 ‘대박’ 조짐을 직감했어요, 하하. 오페라단 코러스 분들과 연습하는데, 내가 평소 생각하고 얘기하고 싶었던 심청과 되게 닮았다, 큰 파장이 일겠구나 싶었죠.”
율희 “처음엔 심청이가 아버지 목을 조르려 하다니, 부모님이 충격받으실까 걱정되더라니까. 결국 극한 상황에서 심청의 선택을 고민했고, 내가 먼저 납득돼야 했고. 이젠 우리의 진심이 관객의 마음에 가닿기를 바라는 거지.”
우정 “전 오히려 전통 무대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표현할 기회가 처음이라 통쾌했어요. 다섯 바탕 중에서도 심청가를 별로 안 좋아했거든요. 사설을 읊으면서 전혀 감정 이입이 안 되고 짜증만 나는 거예요. 착하고 희생만 하는 심청이 너무 지루하고 답답하고.”
율희 “사람은 매 순간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데, 판소리 심청가 안에 가둬진 심청이는 늘 희생만 하니까. 눈 뜨면 맨날 같은 현실이 너무 고통스러울 것 같은데, 정말 그냥 자발적으로 물에 빠졌을까? 늘 꼬리를 물던 의문이 이번 작품에서 어느 정도 풀린 것 같아.”
◇거울처럼 서로에게 비친 심청
국립창극단 '심청'에서 주역 '심청'을 맡은 김율희(오른쪽)와 김우정. /장련성 기자 |
우정 “전주에서 언니 첫 공연 때, 마지막에 무대 위 카메라가 라이브로 아버지 심봉사를 쳐다보는 심청을 비추는데, 그 얼굴에 드러난 분노에 소름이 쫙 끼쳤어요. ‘아, 저 표정이구나!’ 공연 끝나고 박수를 짝짝짝 쳐드렸죠, 하하.”
율희 “심청이 얼마나 외로웠겠어요. 그 고독,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 들끓는 분노, 아버지에 대한 사랑 같은 것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잖아. 우정씨가 연습하는 걸 보며 더 채울 부분과 비워낼 부분을 알 수 있었어.”
우정 “연습 초반엔 처음 어머니 장례 대목부터 나도 모르게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연출님이 ‘심청이는 슬퍼하면 안 된다’고 여러 번 주의를 주셨어요. 언니가 초반에 그런 페이스를 잘 잡아주셨던 것 같아요.”
독일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오페라 연출가 요나 김과 작창·음악감독 한승석 중앙대 교수는 동초제(東超制)와 강산제(江山制) 심청가의 눈대목(판소리의 중요 대목)을 전혀 훼손하지 않은 채 새로운 극적 맥락 속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전에 없던 심청을 창조했다. 유럽 대극장 오페라 스타일을 접목한 무대와 의상 디자인, 라이브 영상 활용을 창극에 접목한 시도도, 150여 명이 한꺼번에 무대에 오르는 규모도 전례가 없다.
◇익숙한 소리에 새로운 감정
제 눈 뜰 욕심에 팔려가게 했던 딸 ‘심청’(가운데 누운 여자)의 죽음 앞에, 아비 ‘심봉사’(가운데 우는 남자)의 뒤늦은 후회는 부질없다. ‘어린 심청’(오른쪽 서 있는 소녀)은 시대의 폭력에 희생당한 ‘세상 모든 딸들’의 상징이 돼 이 모습을 지켜본다. /전주세계소리축제 |
율희 “전통 소리를 ‘정통’으로만 해왔으니 새로운 극적 맥락에 배치된 소리에 다른 감정을 입히는 게 힘들었어요. 누워서 소리 하는 장면이 있는데, 판소리 심청가에선 제발 우리 아빠 좀 도와달라는 효심으로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장면이잖아. 근데 이 작품에선 ‘아버지는 늘 나한테 짐을 지우고, 나는 또 혼자서 다 감당해야 하고, 정말 힘들어 죽겠어, 다 포기할래’ 하는 느낌이니까. 그 맥락을 자꾸 잊고 전통 소리하던 감정이 나오더라고. 물에 빠지기 전 ‘내두름(판소리의 시작 부분)’도 이성을 잃고 미쳐가듯 불러야 했고.”
우정 “심청이가 부친과 이별을 준비하는 ‘눈어둔 백발부친’ 대목을 연습하는데, 전통 판소리에선 되게 처연하게 부르거든요. 근데 연출님은 ‘감정 넣지 말아라’ 하시고, 작창하신 한승석 선생님은 ‘왜 그렇게 퉁명스럽게 부르냐’고 하시고, 하하.”
율희 “그래서 결국 우린 ‘마이 웨이’로, 하하.”
우정 “그러니까요. 약간 목소리를 깎았죠. 음색을 퉁명스럽지 않게, 너무 무뚝뚝하지 않게 하면서도, 감정을 최대한 빼면서. 아, 정말 쉽지 않았어요.”
◇“다시 없을 무대, 맘껏 자유롭게”
국립창극단 '심청'에서 주역 '심청'을 맡은 김율희(왼쪽)와 김우정. /장련성 기자 |
우정 “마지막에 심청이 뱃사람들한테서 한 번 도망가려다 수모를 겪고 잡혀오잖아요. 변주되는 리듬 속에 뒤로 확 돌아서서 객석 쪽을 보는데, 제가 소름이 쫙 끼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이 딱 들더라고요. 이미 다치고 피 흘리며, 서서히 광기에 빠져가는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기 직전에 ‘북을 두리둥둥’ 하고 ‘내두름(판소리의 첫 장단 첫 소리)’하면서, 도망쳐 살고 싶은 희망이나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집착 같은 걸 다 내려놓는, 짐이 탁 덜어지듯 한 그런 순간이에요.”
율희 “나도 그랬어요. 한순간 모든 것이 초연해지고 진심으로 죽을 각오가 되는 순간. 우리 둘 다 어릴 때부터 늘 전통 소리꾼으로서 취해야 할 격식과 태도를 지켜왔잖아요. 그런 극한의 분노를 무대 위에 풀어놓는 게 익숙지 않았는데, ‘이런 기회는 앞으로도 없다. 한 번 마음껏 해보자’ 그런 마음도 들더라고. 거기까지 가는 과정은 굉장히 고통스럽고 힘들었지만.”
우정 “타인의 고통에 눈감고, 희생을 강요하고, 폭력을 방치한 결과가 여기에 있다, 여기 내가 죽는다, 그런 마음으로 노래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번 심청은 사회적 약자들 대신 목소리를 내는 거니까. 그래서 좀 더 강렬한 감정이 차올라왔던 것 같아요.”
두 사람은 되돌릴 수 없는 심청의 죽음 앞에 뒤늦게 후회하는 사람들을 심청이 지켜보는 부분을 가장 가슴 아픈 장면으로 꼽았다. “심청인지 나인지 모를 인물이 객석 앞 무대 끝에 걸터앉아서 담배를 물고, 자기 뒤에 뒤늦게 후회하는 사람들을 바라봐요. 우린 늘 후회하면서 살잖아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공연은 6일까지 단 4회. 김준수와 유태평양이 심봉사, 김율희와 김우정이 심청으로 합을 맞춰 번갈아 무대에 선다.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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