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뉴스
서울
맑음 / 7.3 °
한겨레 언론사 이미지

이어령과 아빠가 알려준, 헤어져도 함께 있는 법 [.txt]

한겨레
원문보기
모유진 작가가 시한부 간암 말기였던 자신의 아빠를 떠올리며 그린 그림.

모유진 작가가 시한부 간암 말기였던 자신의 아빠를 떠올리며 그린 그림.


모유진 | 작가





‘내 것인 줄 알았으나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한 문장으로 수많은 이들의 물결에 파동을 준 이가 있다. 매일 밤, 어둠과의 팔씨름으로 ‘값을 치른’ 이어령이라는 한 어른. 저자가 그에게 물었다. “어둠과의 팔씨름 얘기를 하셨는데, 생각해 보면 선생님은 살면서 패한 일이 거의 없으시지요?”



“아니야. 나는 매번 패했어. 글 쓰는 사람은 매번 패배한다네. ‘갈매기의 꿈’을 쓴 리처드 바크는 갈매기 조나단의 생애를 쓰고 자기 타자기를 바닷속에 던져 넣었다잖나. 그걸로 다 썼다는 거지. 난 그러지 못했네. 내가 계속 쓰는 건 계속 실패했기 때문이야. 정말 마음에 드는 기막힌 작품을 썼다면, 머리 싸매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을까 싶어.”



죽음이 생명을 끝내지만 말을 끝내는 것은 아니라는 이어령 선생님은 살면서 받은 빛나는 선물을 마른 대지를 적시는 소나기처럼 이곳에 남겨두셨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말 앞에 우뚝 걸음을 멈췄다. 일찍 줄기를 꺾어 저문 엄마와 나무 아래 스며 잠든 아빠. 철이라고는 수저밖에 못 들던 어린 시절부터 내겐 죽음이 그리 멀지 않았다. 과묵했던 아빠가 전리품 하나 남기지 않고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유언 말이다.



한차례 시한부 간암 말기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아빠는 흑암과 같던 생활을 청산하고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뿌연 연기 가득한 하우스와 경마장, 붉은 조명 술집과 다방을 휘젓던 사람이 한순간에 말기 암 완치 판정을 받고 전도사님이 되자, 아빠 이야기가 곳곳에서 소개되었다. 그는 변화된 자신의 삶을 간증할 때 유쾌하면서도 진솔했다. 청중은 한때 세상에 찌들었던 조폭 두목의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함께 울고 웃었다. 그러나 꽤 말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그는 유독 하나 있는 딸에게는 말이 없었다. 만약 어릴 때 술집과 다방의 이모들이 말동무가 되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또래보다 말문이 늦게 트였을 거라 장담한다. 자주 가게에 맡겨진 덕에 나는 손님 테이블에서 쫑알거리다가 용돈을 받고, 이모들 몰래 프리마를 퍼먹다가 혼나면서 말을 배울 수 있었다.



아빠가 혈색을 되찾은 뒤로 여름이 두번 찾아왔다. 그 짧은 계절이 흐르는 동안 아빠는 점점 양복을 입는 날보다 내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비쩍 마른 팔다리가 퉁퉁 부어올 즈음 다시 병원에 입원했고, 병문안을 온 낯선 사람들이 복도에서 수군대는 말을 들으며 아빠의 상태를 어렴풋이 느껴야 했다. 이번에는 이겨내기 어려울 거라는 것을.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l 김지수·이어령 지음, 열림원(2021)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l 김지수·이어령 지음, 열림원(2021)

낙엽이 필 때쯤 아빠의 눈동자도 약물로 노랗게 물들었다. 배에 복수가 가득 차 괴로워하던 아빠는 잠시 의식을 차려 ‘집에 가고 싶다’고 하셨다. 마지막을 직감한 의사는 아빠가 침대째로 집에 가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구급차에서 내린 아빠 일행은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보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 침대를 고려하지 않은 아담한 엘리베이터에, 침대를 실을 방법을 찾아야 했고, 반으로 접을 듯 침대를 바짝 세우고서야 겨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배가 빵빵하게 부풀어 있던 아빠는 무의식중에 “아파요”라고 하얗게 질린 입을 열었다고 했다. 좁아서 함께 탈 수 없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을까. 딸 앞에서 아프단 소리 한번 안 하던 아빠가 의식 없이 죄어 오는 침대 사이에서 처음 고통을 뱉었다. 함께 있었다면 그 순간이 오래도록 내 눈에 박혀 아프게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우여곡절 끝에 거실에 누운 아빠 곁으로 사람들이 둘러앉았다. 목사님의 인도로 아빠가 좋아하던 찬송가를 함께 불렀다. 아빠와는 평생 대화를 나누는 게 어색했다. 그래서 눈을 감고 있는 아빠에게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헤매던 사이 찬양이 끝나고, 몇초가 지났음에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거실을 휘감는 정적. ‘공기의 흐름이 달라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온몸으로 느껴졌다. 아빠의 얼굴을 다급하게 더듬었다. 편안히 닫혀 있는 눈을 손으로 열며 외쳤다. “아빠…?”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찾던 아빠는 이미 마지막 숨을 떠난 뒤였다. “유진아, 아빠 돌아가셨어.” 그 자리에 있던 누군가의 선고가 터지자 사방에서 울음이 쏟아졌다. 벽 한편에 서 있던 의사는 조용히 사망 시간을 읊었다. 그렇게 아빠의 삶은 유언 없이 막을 내렸다.



그동안 아빠에 대해 떠올릴 때면 ‘하지 못한 말’에 대해 곱씹었다. 삶의 끝 선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홀로 느꼈을 아빠에게, 시한부 삶을 선고받고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다섯 단계를 거쳐 홀로 실타래를 풀었을 한 남자에게 들려줄 말을. 이를테면, “아빠, 분윳값도 집도 없이 떠돌아다닐 때도 나를 포기하지 않아줘서, 말이 안 통하는 어린 시기를 지켜줘서 고마워요. 아빠는 나에게 세상을 선물해 줬어요. 나이가 들고 아빠의 외로움과 무게를 이해할 때가 오면, 아빠 나무 곁에 도란도란 얘기하러 갈게요” 같은 말들.



저자는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두고 말했다. “늘 애절한 거죠. 매 순간이 지금 이 순간과의 헤어짐이니까요.” 그의 말에 이어령 선생님은 이렇게 답했다. “그러니 나의 이야기를 자네의 문맥 속으로 집어넣게, 그러면 헤어져도 함께 있는 것이라네.”



최근 한 청년을 만났다.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시설에 맡겨져 자란 그는 언젠가 부모님의 빚을 자신의 힘으로 갚고 싶다고 했다. 빚을 피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의 다짐에 물음을 달자, 잠시 할 말을 멈출 수밖에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저는 아버지의 삶이 실패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함께 쓰길 원했다. 말을 잇는 목소리에는 조금의 원망도 묻어 있지 않았다. 아빠와 함께 지내는 동안 배운 유산들을 재료 삼아 삶을 만들어가고자 했다. 헤어져도 함께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어령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은 시대가 감쪽같이 덮어놓은 죽음을 마주할 수 있도록 돕는다. 덮어놓은 것을 들추는 게 철학이고 진리고 예술이라는 말과 함께. 그렇게 아빠의 이야기를 나의 문맥 속에 넣는다. 새벽 다섯시, 문득 일어나 바라본 찬란한 하늘을 볼 수 있게 해준 나의 아빠를.





▶▶[한겨레 후원하기] 시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민주주의, 필사적으로 지키는 방법 [책 보러가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info icon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AI 이슈 트렌드

실시간
  1. 1박세리 부친 사문서 위조
    박세리 부친 사문서 위조
  2. 2주택 공급 신뢰성
    주택 공급 신뢰성
  3. 3김기현 로저비비에 압수수색
    김기현 로저비비에 압수수색
  4. 4오리콘 연간 랭킹
    오리콘 연간 랭킹
  5. 5연탄 나눔 봉사
    연탄 나눔 봉사

한겨레 하이라이트

파워링크

광고
링크등록

당신만의 뉴스 Pick

쇼핑 핫아이템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