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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시각] 손기정이 벌떡 일어날 일이다

조선일보 안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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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1등으로 골인하는 장면. 유니폼에 일장기가 붙어 있다. /조선일보 DB

손기정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1등으로 골인하는 장면. 유니폼에 일장기가 붙어 있다. /조선일보 DB


1936년 독일 베를린. 청년 손기정이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일장기를 가슴에 단 채 고개를 숙였다. 나라를 빼앗긴 시대라 우승하고도 가슴을 펼 수 없었다. 베를린에 거주하던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 안봉근이 그런 손기정을 은밀히 불렀다. 안봉근은 “이것이 우리 조국의 국기”라며 ‘아름다운 무늬’를 보여주었다. 손기정이 태극기를 처음 본 순간이었다. 그는 “온몸에 뜨거운 전류가 흐르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며” 죽었던 조국의 얼굴을 마주했다.

1947년 미국 보스턴. 광복 후 손기정이 길러 낸 후배 서윤복이 마라톤 트랙에 섰다. 일장기 아래 울던 11년 전 베를린의 손기정과 달리, 결승선에 가장 빨리 도착한 서윤복의 유니폼엔 태극 문양과 ‘KOREA’ 글자가 빛났다. 환호 속에서 스승은 제자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손기정은 “태극기를 달고 뛸 수 있는 서윤복군이 부러웠다”고 회고했다.

1988년 한국. 백발 노인이 된 손기정은 말년에 그 긍지를 쟁취했다. 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성화 봉송 최종 주자로 트랙을 달렸다. 가슴팍에 태극 마크가 선명했다. 반세기 전 일장기를 붙이고 고개 숙였던, 태극기를 처음 보고 전율하던 24세 청년은 76세에 자랑스러운 대한국인이 돼 있었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연말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손기정 특별전’은 그 순간을 AI로 재현했다. 칠순을 넘긴 노인이 해맑게 웃으며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그는 “남의 나라 국기로 우승했던 내가 우리 서울에서 성화를 드는 게 너무도 기뻐 그 감정을 이렇게 (아이처럼 뛰면서) 표현했다”고 했다. 아마도 베를린부터 52년 묵은 설움을 털어내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손기정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겹쳐 보였다.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뒤편에 버려진 태극기. 소주병, 성조기, 시위 플래카드 등과 함께 나뒹굴고 있다. /안태민 기자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뒤편에 버려진 태극기. 소주병, 성조기, 시위 플래카드 등과 함께 나뒹굴고 있다. /안태민 기자


이제 2025년 서울. 시위대가 떠난 광장 여기저기 태극기가 버려진다. 몇 시간 전만 해도 함성 속에 펄럭이던 깃발들이다. 어떤 태극기에는 신발 자국이 선명하고, 어떤 태극기는 찢겨 있다. 올해 시위 현장을 취재할 때마다 본 광경이다. 한남동 대통령 관저, 서울서부지법, 여의도, 광화문, 헌법재판소 등지에서 목격했다. 나라를 걱정하며 애국하겠다고 나온 사람들 중 일부는 시위가 끝나면 태극기를 버렸다. 손기정이 본다면 현충원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다.

태극기는 ‘시위 굿즈’일 뿐인가. 시위가 끝나면 버려도 되는 물건인가. 아니면 그것을 흔들던 이들이 더는 기대할 게 없어 내던지고 가는가. 시위 굿즈이든 실망했든 나라의 얼굴은 얼굴이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의 그 태극기다. 광복절 직후인 지난 17일 광화문에도 작은 태극기가 소주병·성조기·팸플릿과 함께 버려져 있었다. 줍는 사람은 안 보였다.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도 슬퍼한 손기정이 그토록 달고 싶어했던 태극기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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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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