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 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20대의 문재현은 여의도의 한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무역업무를 하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런 그가 1993년 국립극장에서 관람했던 일본 인형극단 8왕자의 '설녀'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가 됐다.
"혼자 보러 간 공연이었어요. 그때 왜 그 티켓을 샀는지 모르겠는데, 그때 보았던 무대만큼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요. 나무꾼 할아버지가 눈 오는 밤 할머니와 호롱불 아래서 과거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었는데, 그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 있던 '설녀'였다는 사실이 밝혀져요. 마지막에 파란색 조명과 눈 내리는 장면이 너무나 멋진 장관이었어요."
인형극 아티스트 문재현 |
20대의 문재현은 여의도의 한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무역업무를 하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런 그가 1993년 국립극장에서 관람했던 일본 인형극단 8왕자의 '설녀'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가 됐다.
"혼자 보러 간 공연이었어요. 그때 왜 그 티켓을 샀는지 모르겠는데, 그때 보았던 무대만큼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요. 나무꾼 할아버지가 눈 오는 밤 할머니와 호롱불 아래서 과거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었는데, 그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 있던 '설녀'였다는 사실이 밝혀져요. 마지막에 파란색 조명과 눈 내리는 장면이 너무나 멋진 장관이었어요."
공연이 끝난 후 한껏 흥분하면서 팸플릿을 읽다가 서울인형극회가 초청한 일본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로비에는 서울인형극회의 안정의 대표가 서 있었다.
"팸플릿에 극단 대표 얼굴이 있었거든요. 그냥 딱 알아보겠더라고요. 무턱대고 다가가서 저도 모르게 '인형극을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가만히 저를 바라보시다가 '그럼, 와라' 하시는 거예요. '한 달 반만 있다가 가겠습니다' 하고는, 그 길로 회사를 정리하고 극단으로 찾아갔죠."
서울인형극회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1960년대 창단된 서울인형극회는 국내의 대표적인 인형극단 중 하나였다.
문재현은 매일 헐렁한 운동복을 입고 극단 사무실에 나가 바닥을 쓸었다. 연습 중인 선배들이 인형을 돋보이게 하려고 자기 몸을 낮추거나 비틀어 찌그러뜨리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나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1년에 딱 두 번만 쉬면서 밤 11시까지 공연과 연습을 반복했지만, 밤에 잠자리에 들 때면 아침에 다시 극단에 나갈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인형이 저를 대신한다는 점 때문에 인형극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제가 직접 연기해야 하는 배우였다면 이렇게까지는 못 했을 것 같거든요. 저는 인형을 움직이고, 인형은 저를 대신하는 일이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문재현이 인형을 대하는 애정과 태도는 대개의 인형극 아티스트가 갖는 공통점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연출가 유홍영이 선배의 작품을 온전하게 이어갈 만한 후배로 문재현을 선택한 까닭은 그가 지닌 단순명료함과 삶의 본질에 닿아있는 담백한 진정성 때문이다.
"김은영 선생님의 작품을 연습할 때, 너무 어려웠어요. 원작의 철학적인 의미가 어느 순간에는 이해되는가 싶다가도 대사로 뱉고 나면 어쩌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하루는 무릎을 꿇고 장면을 연습하는데, '선생님, 우리가 사는데 철학이 꼭 필요한가요?'라는 대사가 목에 걸려서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지금도 저는 계속 찾아가는 중인 것 같아요."
문재현의 재창작은 과거 인형극의 단순 복제가 아니라 인형극 분야의 세대 간 소통과 창조적 예술 관계에서 새롭게 바라보고 해석할 필요가 있다. 원작의 제목은 부분적으로 수정한 후 단순해졌고, 원작의 에피소드 6개에 새로운 3개의 에피소드가 덧붙여져 지금은 총 9개의 에피소드로 공연하고 있다.
인형극 '북극성을 찾아랏!'에서 공연하는 문재현 |
1인 인형극 아티스트이지만, 문재현은 혼자가 아니다. 그는 현재 '독립공연예술가 네트워크'의 일원으로 활동 중이다. 이 모임은 2012년 국립극단 어린이 청소년극연구소 부소장이었던 유홍영이 '배우 스스로 창조적이고 독립적인 예술가가 되자'는 비전을 제시하며 독립공연예술가 양성 교육프로그램을 만든 데서 시작됐다.
2014년부터는 이 모임의 예술가들이 각자의 재능으로 서로의 역량을 키워주는 씨앗 모임을 만들기 시작했고, 2017년부터는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네트워크를 이어 나가고 있다.
현재 '독립공연예술가 네트워크'에는 약 40명의 예술가가 참여하고 있으며, 인형극, 소리, 움직임 등 다양한 장르의 1인 무대공연 예술가가 모여있다.
이 모임의 일원이 되고자 할 때는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한다. 매년 한 번씩 이뤄지는 신입회원 심사에는 기존 회원 모두 참여해서 구성원의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원칙으로 한다.
심사의 기준은 실력과 기술의 우수성보다 예술가로서의 태도와 공동체적 가치에 더 큰 무게를 둔다.
"저희는 씨앗 모임의 성격이라서 모임 안에 작은 창작 소모임이 많고, 멤버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모임을 이동하거나 수시로 만들기도 해요. 자기 창작 활동에 서로가 피드백을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성장을 격려하는 방식이죠. 자신의 작업을 꾸밈없이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아야 하니까 서로의 지적을 새로운 자극과 고마운 응원으로 받아들이는 존중감과 자신을 낮추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발표 때는 서로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참관해 주고 코멘트하기 위해 노력하죠. 관계와 성장을 우선시하는 1인 아티스트라면, 누구에게라도 열려있습니다."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춘 채 무생물(인형)과 생명체(인간)의 경계를 다루는 인형극 아티스트, 그중에서도 1인극 아티스트는 훨씬 더 치열하고 고독하게 자신과의 싸움을 치러내는 사람들이다.
그 싸움이 혹독할수록 복잡한 것은 점점 더 단순해지고, 단순한 것은 가장 본질적인 것이 된다.
촛불과 붓 하나로 그려내는 문재현의 그림자 인형극 '어느날 까치를 보았는데'는 단순함이 지닌 경이로운 가치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 단순함이야말로 1인극 아티스트 문재현이 인형극을 통해 관객에게 전하고자 했던 가장 강렬한 메시지이자, 진정한 예술의 언어다.
선연(禪蓮) 김수미. 연극 평론가
▲ 전 월간 '객석' 연극전문 기자. 현 중랑문화재단 문화정책사업팀장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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