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뉴스타파는 HS효성 조현상 부회장의 비리 의혹을 보도했습니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어메이징 타워를 둘러싼 조 부회장의 차명 매입 의혹, 부정 대출 의혹, 보증금 횡령 및 배임 의혹을 종합적으로 다뤘습니다.
기사를 쓴 당사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조금 민망하지만 이 기사는 꽤 중요합니다. 조 부회장이 개인 비리를 덮기 위한 보험용으로 김건희 집사 회사에 35억 원을 투자한 것으로 특검이 의심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 부회장이 덮고 싶어했던 그 비리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추적해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기사가 나가고 난 뒤 특검에서 큰 관심을 보이며 뉴스타파에 연락을 해오기도 했습니다.
요즘 언론사들이 가장 주목하고 있는 이슈 중 하나가 김건희 특검의 수사입니다. 누가 출석해 조사를 받는지, 특검 조사에서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등 사소한 것 하나 하나가 모두 기사거리입니다. 따라서 특검이 이렇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수사하고 있는 조현상 부회장의 혐의에 대해 구체적이고 상세한 보도가 나왔으면 어느 언론이든 한번쯤 관심을 가져볼만 합니다. 타사 보도를 인용하거나 추종하는데 인색한 한국 언론의 관행을 감안하더라도 말이죠.
그런데 뉴스타파 보도를 인용하거나, 하다 못해 출처 인용은 하지 않더라도 조현상 부회장의 비리에 대해 언급한 언론은 단 한 곳도 없었습니다. 제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 온 기자도 없었습니다. 그리 놀랍지는 않습니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까요. 뉴스타파가 지난 5월 김건희 집사 게이트를 처음 폭로했을 때 역시 단 한 곳의 기성 언론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특검이 수사를 한다고 하자 그제서야 여러 언론들이 뉴스타파 보도를 베끼면서도 ‘단독’ 타이틀을 붙여 내보냈죠. 안타깝지만 익숙한 일입니다. 기성 언론들이 무관심하다고 해서 징징거릴 생각은 없습니다.
0 vs 70… 조현상 비리 보도 이후 갑자기 쏟아진 미담 기사
그런데 그 뒤에 벌어진 일은 웃어 넘기기 어렵습니다. 뉴스타파가 조현상 부회장의 비리 기사를 보도한 지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HS효성 조현상 부회장에 대한 미담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한 겁니다.
“HS효성, 임직원에 ‘싸이 흠뻑쇼’ 티켓…조현상표 ‘컬처 투게더’ 확대" (2025.8.22, 서울경제)내용은 대동소이합니다. 조현상 부회장의 제안으로 HS효성의 사내 이벤트가 열렸다는 겁니다. 임직원 100여 명을 뽑아 싸이 흠뻑쇼를 단체 관람시켜주는 이벤트입니다. (기사에는 100여 명이라고 나와있지만 첨부된 포스터에는 30명을 추첨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HS효성 계열사의 임직원 숫자가 1만여 명이니 100명이면 1%, 30명이면 0.3%가 싸이 흠뻑쇼 무료 관람의 혜택을 입은 셈이죠. 싸이 흠뻑쇼의 티켓 가격이 대략 15만 원이니까 적게는 450만 원에서 많게는 1,500만 원 정도를 들여 사내 이벤트를 하나 한 셈입니다. 참고로 HS효성 계열사의 매출은 7조원 정도입니다. 이게 그렇게 대단한 기사 가치가 있는 일인지는 상식적인 독자라면 판단할 수 있을 겁니다.
“HS효성, ‘컬처 투게더 시리즈’로 임직원 문화 가치 공유" (2025.8.22, 뉴스1)
“HS효성, 임직원 문화 가치 공유 확대 나서" (2025.8.22, 매일경제)
-
네이버에서 'HS효성 조현상'을 검색하면 똑같은 내용의 보도자료를 베낀 기사 70건이 쏟아져 나온다.
8년 전의 기억.. 한화 김승연의 ‘프리즌브레이크’
저는 과거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습니다. 지난 2017년 12월, “한화 김승연 회장의 프리즌브레이크”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을 때였습니다.
2012년 횡령 배임으로 징역 4년형을 받고 구치소에 수감된 김승연 회장이 질병을 이유로 대학병원에 입원하고 결국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받았는데, 취재를 해보니 김승연 회장의 건강이 정말로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받을만큼 위중한 것이었는지 의문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김 회장이 입원했던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의 모 교수는 김 회장에게 ‘알츠하이머성 치매’라는 진단을 내렸고 이 진단은 구속집행정지의 결정적 근거가 됐습니다. 그런데 알츠하이머성 치매는 퇴행성 질병으로 회복 가능한 질병이 아닙니다. 그런데 김승연 회장은 12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한 정신과 전문의는 최근 뉴스타파와의 통화에서 “당시 진단이 가짜가 아니었다면 해당 의사는 세계 최초로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치료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한화그룹의 상무는 당시 김회장이 입원했던 서울 보라매병원 담당 의사에게 금품 전달을 시도했고, 의사가 이를 거부하자 보라매병원의 건강검진 상품 1억 원 어치를 구매해 준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제가 이런 내용을 취재하자 당시 한화그룹은 기사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광고를 받지 않는 뉴스타파에는 외압을 행사할 통로가 없었죠. 기사는 당연히 예정대로 나갔습니다. 그 뒤에 벌어진 일은 예상대로입니다. 뉴스타파 기사가 나간 다음 날부터 한화 김승연 회장의 미담 기사가 포털 사이트를 도배하기 시작했습니다.
8년 전에도 한화 김승연 회장의 구속집행정지 관련 의혹을 보도하자 곧 미담 기사로 포털이 도배됐다. (출처 : 미디어오늘)
제 기억으로 당시 한화그룹이 제 기사를 묻어버리기 위해 동원한 언론사는 약 40여 곳이었습니다. 이번에 HS효성은 70곳입니다. 8년 사이 포털과 제휴한 매체가 더 늘어나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한국 언론이 그만큼 더 혼탁해진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뉴스타파가 취재하고 검찰이 조지면 언론사가 돈을 버는 구조”
이런 일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궁금했습니다. 평소 알고 지내던 한 인터넷 매체 대표 A 씨에게 사정을 물었습니다. 그는 익명을 전제로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A 씨는 “효성은 원래 오너 리스크가 많아 매체 관리를 열심히 하던 곳”이라며 “HS효성 계열 분리 이후에도 이런 기조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매체 관리란 무엇일까요. 바로 광고비를 정기적으로 집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터넷 매체를 기준으로, 매체의 영향력에 따라 적게는 연간 500만 원에서 많게는 수천만 원까지 광고비를 주고 정기적으로 광고를 게재합니다. 이렇게 우호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상태에서 재벌 그룹 홍보팀이 보도자료를 뿌리면 상당수 매체가 별다른 필터링 없이 보도자료를 기사화합니다. A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돈 받고 써주는 건데 건건이 계약을 하는 게 아니고 연 단위 계약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이번의 경우처럼 오너의 비리 기사를 ‘묻어버리기 위해’ 특별히 더 많은 기사가 필요한 경우, 보도자료를 뿌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일일이 전화를 걸거나 문자 메시지 등을 보냅니다. 어떤 매체는 그냥 그런가보다하고 기사를 써주지만 어떤 매체는 그리 고분고분하지 않습니다. 추가 광고를 요구합니다. “이를 테면 효성이 천만 원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특별한 부탁이 있으면 집행을 한 번 더 해야겠죠. 200짜리든 300짜리든.” (A씨)
그래서 뉴스타파 같은 곳에서 재벌 그룹 오너에 대한 폭로 기사를 낼 경우 많은 언론들이 이를 무척 반가워한다고 A씨는 말했습니다. 뉴스타파 기사를 인용 보도하지 않는 것으로도 생색을 낼 수 있고 뉴스타파 기사를 묻어버리기 위한 미담 보도자료 기사를 내주는 것으로도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건이 터지면 언론사들은 고마운 거죠. 기업이 광고비를 증액해주니까. 뉴스타파가 열심히 취재하고 검찰이 조지면 언론이 돈을 버는 구조입니다.실제로 저는 지난 2016년 이건희 회장의 성매매 사실과 삼성그룹의 조직적 개입 의혹을 보도했을 때도 모 경제지 기자로부터 비슷한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인보씨, 지금 언론사들하고 삼성 사이에 ‘큰 장’이 섰어”
- A씨 / 인터넷 언론사 대표
한국 언론은 망하지 않는다? “망하지 않는 이유가 망하는 이유”
‘언론의 위기’가 회자되기 시작한지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제가 처음 언론사에 입사했던 2005년 당시, 신입 사원 연수에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앞으로 20년 후면 지금 존재하는 신문사 가운데 절반 이상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알기로 2005년 이후 폐업한 주요 신문사는 단 한 곳도 없습니다. 슬로우뉴스에 따르면 2004년 이후 미국은 신문 광고 시장의 80%가 날아갔는데 한국은 20% 줄어드는 것에 그쳤다고 합니다. 협찬과 후원 등 유사 광고를 더하면 주요 신문사의 매출은 그대로거나 오히려 성장했다고도 합니다. 종이신문과 인터넷 신문 매출까지 합치면 신문들의 매출은 오히려 더 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신문 광고 총액의 80%가 줄었는데, 한국에서는 20% 정도가 줄어드는 것에 그쳤다. (출처 : 슬로우뉴스)
종이 신문의 매출은 소폭 감소했지만, 인터넷 신문 등을 합치면 전체 신문 매출은 여전히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출처 : 슬로우뉴스)
그런데 한국에서만 유독 언론이 망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위에서 언급한 HS효성과 한화그룹 같은 사례, 즉 ‘삥뜯기‘ 혹은 ‘보험료’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일 겁니다. 위 사례처럼 광고비 ‘연간 계약’으로 돈을 받아낸 뒤 보도자료를 받아 기사를 써주고, 오너 리스크나 기업의 악재가 터지면 이를 빌미로 추가 광고를 받아내는 행태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돈을 받고 작성한 사실상의 광고를 별다른 표시없이 기사처럼 내주고, 각종 행사와 포럼을 개최한 뒤 기업에 표를 강매하게 하는 등등의 온갖 약탈적 영업 행태가 한국 언론을 연명하게 해줍니다. 아니 아예 이같은 ‘삥뜯기’ 모델에 기반한 매체들이 오히려 우후죽순 생겨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의 총합은 참담합니다. 한국 언론에 대한 신뢰도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입니다. 언론사 웹사이트 직접 방문이든 포털이든 뉴스 자체에 대한 트래픽이 급감하고 있습니다. 개별 언론사는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고 있다지만 그 선택의 결과가 전체 생태계를 망가뜨리고 있는 겁니다. 이른바 ‘공유지의 비극’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슬로우뉴스는 이같은 상황을 “망하지 않는 이유가 망하는 이유”라고 압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누가 한국 언론을 동정할 것인가
기자들은 점점 더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잃고 있습니다. 기자들에 대한 사회적 평판도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됐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포털과 유튜브, AI에 이르는 기술적 변화들은 하나같이 기성 언론의 생태계를 위협하는 힘으로 작동합니다. 수익 압박에 직면한 언론사는 ‘어쩔 수 없이’ 기업을 삥뜯고, ‘어쩔 수 없이’ 낚시 기사를 양산하고 ‘어쩔 수 없이’ 광고와 기사를 맞바꿔 왔습니다. HS효성 조현상이 회삿돈 1,500만 원을 들여 임직원들에게 싸이 흠뻑쇼를 보여줬다는 기사 70개가 양산되면서 뉴스타파의 조현상 비리 기사를 밀어내버린 것도 다 개별 언론사와 개별 기자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어쩔 수 없는’ 구조는 기자 개인 혹은 개별 언론사들이 내린 선택의 총합이기도 합니다. 한국 언론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개별적 선택을 통해 만들어낸 이 구조 안에서 독자들은 진짜 뉴스를 만날 기회를 빼앗기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저를 포함한 한국의 언론인들은 누구의 동정도 기대할 자격이 없어질 겁니다.
뉴스타파 심인보 inbo@newstapa.or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