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근간으로 히치콕의 필름 누아르 스타일을 입히고 재창작한 관객 주도형 이머시브 공연 '슬립 노 모어' 서울 공연 모습. /미쓰잭슨 |
“셰익스피어 시대 관객은 공연이 맘에 안 들면 양배추를 던졌어요. 관객에게 그 권력을 돌려주고 싶었죠. 내가 재미있는 장면을 찾아다니고, 별로라면 머물 필요 없는 연극을 만들면 어떨까?”(펠릭스 배럿)
“할리우드 영화는 기승전결이 뚜렷하지만 우리 사는 건 안 그렇죠. 저 모퉁이를 돌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굴 만날지 모르잖아요. 인생은 결정의 순간들의 집합이고, 이 공연도 그렇습니다.”(맥신 도일)
세계 265만 관객이 본 이머시브 공연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를 만든 영국 공연 제작사 펀치드렁크의 예술감독이자 연출가 펠릭스 배럿(흰 옷)과 협력 연출·안무가 맥신 도일. /미쓰잭슨 |
지난 21일 한국 제작사 미쓰잭슨(대표 박주영)이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 건물을 개조한 공연장 ‘매키탄 호텔’에서 개막한 ‘슬립노모어(Sleep No More) 서울’은 종잡을 수 없다. 관객은 흰 가면을 쓰고 3시간 동안 7층 규모 공연장을 스스로 배우들을 따라 누비며 동시다발로 진행되는 18가지 이야기 중 무언가를 경험한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근간이지만 무대도 객석도 안내자도 없고, 히치콕의 흑백 필름 누아르 분위기인데 뜻밖의 충격적 장면이 곳곳에 숨어 있다. 갈피 없이 악몽의 조각들 속을 헤매는 것 같은데, 우아하고 아름답다.
2003년 런던에서 처음 시작해 미국 보스턴과 뉴욕, 중국 상하이 등에서 연인원 265만 관객이 봤고, 서울 공연장 앞에도 관객이 길게 줄을 선다. 세상에 없던 이 공연의 창조자는 영국 공연 제작사 펀치드렁크의 예술감독이자 연출가 펠릭스 배럿(Felix Barrett·48)과 협력 연출·안무가 맥신 도일(Maxine Doyle·55). 두 사람에게 이 공연의 비밀을 물었다.
◇“초 단위로 설계된 꿈… 본능을 현실로”
아무리 열심히 계획을 세워도 실제 공연장에서 부딪치면 예상은 빗나간다. 긴 복도에선 ‘맥베스’의 마녀들이 손짓 한 번에 공포영화처럼 긴 복도의 조명을 켜고 끄고, 던컨 왕을 살해한 맥베스와 레이디는 죄책감을 온몸에 피처럼 뒤집어쓴 채 옆방에서 춤춘다. 배럿은 “완전히 새로운 관객 경험을 이끌어내기 위해 배우들의 움직임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도록 초 단위로, 수학적으로 설계돼 있다”고 했다.
빛과 소리, 층별 이벤트의 타이밍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관객에게는 즉흥적인 느낌이 들도록 하는 게 포인트. 도일은 “통제하고 싶은 욕망을 내려놓고 순간에 집중하며 본능이 당신을 이끌도록 귀 기울이며 감각적인 세계에 몰입하길 권한다”고 했다. “캐릭터가 궁금하면 따라가고, 방이 궁금하면 문을 열고, 천둥소리가 궁금하면 찾아가세요. 직감을 따라가면, 갑자기 그 세계에 빠져들어 시간이 흘러가는 걸 잊게 될 거예요.”
배럿은 “이 공연은 무대 위 연극보다 전시물들이 되살아나는 어두운 밤의 박물관을 횃불을 들고 탐험하는 것에 더 가깝다”고 했다.
◇“시작 땐 공연마다 경찰 들이닥쳐”
'슬립 노 모어' 서울 공연. /미쓰잭슨 |
런던 ‘슬립노모어’ 공연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 전까지, 배럿과 도일의 공연 집단 ‘펀치드렁크’의 공연은 올릴 때마다 경찰들이 경찰견을 끌고 들이닥쳤다. 배럿은 “지금은 모두가 관객 몰입형 공연 ‘이머시브 시어터(immersive theater)’를 말하지만, 그때는 개념 자체가 낯설었다”고 했다. “연극을 한다면서 극장도 없고, 빈 건물에 수상한 사람들이 모여드니 불법 파티나 범죄 집단인가 의심한 거죠.” 배럿은 “난 그게 좋았다. 우린 위험한 극장을 만들고 싶었고, 배우를 따라 위험할지도 모르는 모험에 나서는 관객의 두근거림을 함께 느끼고 싶었다”고 했다.
도일은 “‘슬립노모어’를 비롯한 펀치드렁크의 공연을 통해 ‘이머시브’라는 이름표는 관객을 특별한 경험으로 초대한다는 의미가 됐다”고 했다. “지금은 모두가 우리 공연을 벤치마킹하죠. 그 자체가 우리에겐 큰 칭찬입니다. 우린 세계 공연의 흐름과 관객의 공연 체험 방식을 바꿨다고 생각해요.”
◇“새 작품은 라이브 액션 비디오 게임”
'슬립 노 모어' 서울 공연. /미쓰잭슨 |
배럿은 “공연 예술의 미래는 게임과 관객 경험의 교차점에 있다”고도 했다. 준비 중인 신작 ‘랜더(Lander) 23’의 부제는 ‘라이브 액션 비디오 게임’. 그는 “2011년 뉴욕에서 슬립노모어를 개막했을 때 한 신문이 ‘올해의 게임’이라고 표현하더라”고 했다. “처음엔 ‘우린 연극인데 이게 뭐지?’ 했지만, 결국 깨달았죠. ‘아, 우리가 만든 게 비디오 게임과 꽤나 비슷하구나’ 하고.”
어드벤처 게임의 메커니즘을 라이브 공연과 접목할 기술 개발을 거듭했다. 배럿은 “내달 영국에서 개막할 ‘랜더 23’은 컨트롤러와 아바타 대신 관객 자신이 게임의 플레이어가 되는 첫 공연이 될 것”이라고 했다. 11월 중국 상하이에선 게임 원작인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아케인’을 이머시브 뮤지컬로 개막한다.
“게임과 공연, 영화와 공연 같은 다양한 장르가 부딪쳐 역동적인 불꽃을 튀길 때 전기가 흐르는 듯한 에너지를 느끼죠. 마치 원자가 충돌해 분자를 만드는 것처럼, 그 충돌에서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가 태어나니까요.”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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