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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는 달고 분노는 쓰다 [이진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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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윤석열 대통령 파면을 선고한 지난 4월4일 광주 동구 5·18민주광장에서 열린 광주시민 승리대회에서 한 시민이 손팻말을 들고 무대를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대통령 파면을 선고한 지난 4월4일 광주 동구 5·18민주광장에서 열린 광주시민 승리대회에서 한 시민이 손팻말을 들고 무대를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이진순 | 성공회대 겸임교수



요즘 방송 예능은 리얼 다큐가 대세다. 채널마다 경쟁이라도 하듯 ‘스펙’과 외모가 출중한 미혼 남녀는 물론, 돌싱, 시니어, 연예인, 심지어 어린 자녀들까지 동원해 비슷비슷한 포맷의 짝짓기 프로그램을 쏟아낸다. 위기가정의 갈등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프로그램도 인기몰이 중이다.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에 흥행을 이끄는 일등 공신은 악역 출연자들이다. 눈치 없고 오만하거나 억지를 부리는 인물이 등장하면 시청률은 높아진다.



위기가정 프로그램에서는 알코올중독, 게임중독, 가정폭력, 의처증과 불륜이 빠지지 않고 다뤄지는데, 시청자들은 이들이 심리상담사나 정신과 의사, 진행자에게 혼쭐이 나는 걸 보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막장 드라마의 성공 요인이 ‘욕하면서 보게 만드는 마력’인 것처럼, 시청자들은 문제적 인물을 마음껏 욕하고 비난하는 재미로 방송을 본다. 마치 일상의 울화를 달래기 위해 처음부터 작정한 듯, 누군가에게 폭탄 같은 증오를 발산한다. 가장 값싸고 만만한 스트레스 해소법인 셈이다.



최근 이혼위기 부부를 다룬 프로그램을 보다가 스스로 움찔했다. 왜 저기 나오는 남편들은 하나같이 무직이거나 택배노동자인가? 옹색한 살림에 쌓여 있는 연체 고지서, 빈곤과 유기의 유년기 트라우마, 학교폭력과 집단 따돌림, 어디서도 환대받지 못하고 주목받지 못한 이들의 거친 공격성…. 고작 ‘고생했어’란 따뜻한 말 한마디에 무너질 듯 오열하는, 여리디여린 상처투성이 인생들에게 돌멩이를 던지는 걸로 자기만족을 얻으려 한 내 얄팍한 정의감이란 뭔가? 무대에 오른 문제적 인물을 손가락질하는 동안, 노동과 복지, 교육과 양육의 빈 구멍은 커튼 뒤로 사라진다. 김수영의 시처럼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옹졸하게 성을 내고 증오하는 나는 참으로 비루하였다. 개인을 증오하기 전에 그들을 삶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간 구조에 분노해야 마땅했다. 미안하고 부끄럽다.



증오와 분노는 다르다. 증오는 사이다 맛이다. 달고 짜릿하고 속 시원하다. 증오는 특정한 대상을 위험인자로 간주하고, 적대와 배제의 대상으로 삼는다. 증오의 종착점은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을 없애버리거나 무릎 꿇리는 것이다. 선악이 분명하고 이견은 이단이 된다. 우리 편에 불리한 이야기를 꺼내는 자들은 배신자, 부역자로 응징을 받는다. 증오에 기반한 집단 공격은 즉각적이며 효과적이다.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십자군 전쟁이다. 오늘날 한국 정치는 증오의 각축장이다. 사이다 맛의 유튜버와 사이다 맛의 정치인이 손을 잡으면 천하무적이 된다.



분노는 쓰다. 분노는 특정 인물이 아니라 불의를 재생산하는 시스템을 대상으로 삼는다. 분노는 나 자신과 내가 속한 집단의 부조리를 관용하지 않는다. 잘못된 구조를 창의적으로 재구성하는 방법에 대해 아무도 정답을 모르기 때문에 서로 충돌하고 갈등하며 더듬더듬 새길을 모색한다. 레지스탕스 출신의 스테판 에셀은 2010년 ‘분노하라’를 통해, 극심한 빈부격차와 인권유린에 분노하고 저항하라고 호소했다. 그의 절규는 유럽 전역에 ‘분노 신드롬’을 불러일으켜 2011년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인디그나도스) 운동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 스테판 에셀이 말한다.



“나는 호소합니다. 우리의 정신을 완전히 개혁하자고. 폭력은 거부해야 합니다. 우선 효과가 없기 때문에 그래야 합니다. 폭력 행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증오만이 더욱 깊이 뿌리내리며 복수심이 더욱 불타오를 뿐입니다.”(‘분노하라’ 중에서)



증오는 구조악을 답습한다. 팬티 바람으로 조사를 거부하며 발버둥 치는 윤석열이나 ‘아무것도 아닌 사람’ 주제에 브이제로(V0) 행세를 한 김건희를 누구보다 신랄하게 조롱하고 증오하면서도, 권력에 기대 뭐라도 한자리 맡아볼까 싶어 기웃거리는 일부 엘리트들의 행태는 구차스럽다. 권력에 유착해 이권을 얻는 시스템이 완전히 근절될 때까지 ‘분노한 사람들’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나 역시 증오와 분노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다. 증오하는 이들의 폭력에 증오로 응수하고 싶은 충동에, 면도날 위를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매 순간 위태롭다. 그럴 때마다 곱씹는다. 증오가 고주파라면 분노는 저주파라고. 극심하게 요동치고 반사하는 고주파의 직진성이 아니라, 넓게 퍼지고 멀리 침투하는 저주파의 에너지가 단층을 움직이고 건물을 붕괴시킨다고. 분노해야 할 것을 증오로 탕진하지 말고, 분노를 증오로 퉁치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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