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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유예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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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교 | 홈스쿨링생활백서 대표



강연이 끝난 뒤 마련한 질의응답 시간. 관중 사이로 손 하나가 불쑥 올라온다. 앳된 얼굴의 참가자가 자기소개를 하며, 자신이 다니는 고등학교의 이름을 이야기한다.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그 청소년은 누구나 아는, 그러나 아무나 들어가기는 힘들다는 특수목적고등학교의 재학생이었다. 카메라에 비친 질문자의 모습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자, 그를 바라보는 학부모들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러나 이내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가 ‘경쟁’에 대해 말하기 시작해서다. 경쟁 끝에 들어온 학교에서 또다시 반복되는 경쟁. 명문대에 가지 못하면 이상한 사례로 남아버리는 환경에서, 자신을 갉아먹고 있는 학생들에 대해서.



“이 학교에 오기 전에는 감기 한 번 안 걸리는 튼튼한 체질이었는데, 지금은 시험 기간만 되면 온몸이 아파요.”



시험이 다가오면, 아픈 학생이 속출한다. 공부하기 싫어서 꾀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극심한 스트레스가 신체적 고통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워낙 잦다 보니, 이제는 학교 차원에서 증상을 관리한다고 했다. 이 학생은 시험 기간이 되면 두드러기가 난다, 이 학생은 구토 증세가 심해지니 내과에 가야 한다는 식으로 질병 정보를 숙지해 두는 것이다.



이에 더해, 학생들이 저마다 진통제, 소염제 등 갖가지 약이 한 움큼씩 담긴 개인 약통을 들고 다닌다고 했다. 병원에 간다고 해도 큰 도움을 받기 힘들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도 알고 있다. 잠을 너무 적게 자서, 에너지 드링크를 너무 많이 마셔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아픈 것이라는 걸. 주사도, 약도 아닌 충분한 휴식만이 정답이라는 것도.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은 적응이 아닌 체념을 한다. 학기가 지날수록 약통에 든 약은 하나둘씩 늘어날 것이다. 그들의 통증은 약을 먹을 때가 아니라, 입시가 마무리될 때 멎을 테니까.



자칫 극단적인 사례처럼 들리지만, 사실 학구열이 치열한 학교일수록 이런 현상이 흔히 발생한다. 시험 기간이 되면 이른바 ‘명문고’ 재학생들에게서 종종 이메일이 온다. 사연도 가지각색이다. 성적표를 떠올리기만 해도 숨 쉬는 게 힘들어요, 친구들이 모두 경쟁자로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 끝에 공통으로 달려 있는 말은, 지금의 괴로움을 참지 못해 추후 실패한 삶을 살게 될까 두렵다는 것이었다.



나는 보통 갖은 이유를 들며 자퇴를 말리는 편이지만, 이런 사연을 읽고 있자면 감히 냉정한 조언 같은 걸 건넬 엄두가 나지 않는다. 보건복지부의 청소년 건강 행태 조사에 따르면, 100명 중 약 3명의 청소년은 이미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 괴로워하거나 죽음을 상상하는 것을 넘어, 삶의 벼랑 끝에 선 청소년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이다.



실패를 선명하게 규정할수록 실패와 쉽게 가까워진다. 고통은 늘 새롭고 섬세한 탈을 쓰고 찾아오니까. 그러니 수능만 끝나면, 입학만 한다면, 취업만 한다면. 그렇게 계속 행복을 유예하라는 말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어쩔 수 없지’라고 말하는 대신, 당장 그 현실을 바꿀 방법을 찾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만 한다. 언젠가 행복해질지도 모르는 어른이 아니라, 지금 행복한 청소년을 만드는 것이 교육의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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