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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 지킨 식민지 여성들의 당당한 삶”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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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이 작가가 지난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카페 에무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기에 앞서 사진을 찍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이금이 작가가 지난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카페 에무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기에 앞서 사진을 찍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한국 아동·청소년 문학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겨온 이금이 작가가 일제강점기 사할린에 이주한 한인들의 이야기를 그린 장편소설 ‘슬픔의 틈새’를 내놨다. 출간 시기가 마침 광복 80주년과 맞아떨어졌다. 이로써 앞서 2016년 첫 역사소설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사계절)를 시작으로, 2020년 ‘알로하, 나의 엄마들’(창비)에 이어 2025년 8월 ‘슬픔의 틈새’(사계절)에 이르는 ‘일제강점기 한인 여성 디아스포라 3부작’의 대장정이 마무리됐다. 세 작품 모두 나라 잃은 백성들이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끈질긴 생명력과 놀라운 적응력으로 삶을 개척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첫 작품이 나온 지 햇수로 10년, 그 작품을 처음 구상한 때로부터는 무려 20년이라는 긴 시간의 큰 매듭이 지어졌다. 1984년, 22살에 아동문학 작가로 처음 등단한 이후 41년 만의 결실이다.



지난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복합문화공간 에무에서 작가를 만났다. ‘슬픔의 틈새’ 1쇄본이 막 인쇄되어 나온 날이었다. 감회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이라는 게 마음속에 있는 어떤 무형의 것을 꺼내놓는 거잖아요. 제가 이런 걸 다 해냈구나, 하는 느낌은 없어요. 그보다는, 제가 ‘사할린 이야기를 쓸 거다’라는 게 이미 많이 알려진 참이어서, 그걸 이제 끝냈구나, 계획했던 것을 무사히 꺼내놓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가장 컸어요.”



거기, 내가 가면 안돼요? l 사계절(2016), 각권 1만2000원

거기, 내가 가면 안돼요? l 사계절(2016), 각권 1만2000원


세 작품의 구체적인 시대 배경과 공간적 무대는 다르다.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는 3·1 운동이 일제의 폭압으로 꺾인 이듬해 1920년부터 해방의 기쁨과 희망이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의 비극으로 얼룩진 1954년까지, 소작농의 딸로 태어난 수남이 일곱살에 친일파 귀족 집안의 딸 채령의 생일 선물 몸종으로 팔려간 뒤 펼쳐지는 이야기다. 신분 격차, 인종 차별, 배움의 장벽을 뛰어넘는 성장기가 한반도, 일본, 중국, 옛소련의 바이칼호수, 미국 대륙의 동서 양쪽 끝까지 지구의 절반을 넘나든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은 일제의 강제 합병 직후인 1910년대가 배경이다.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한인 이주노동자들의 ‘사진 신부’로 태평양 한가운데 섬으로 건너간 열여덟살 버들과 또래 여성까지, 신분도 성장 과정도 달랐던 세 주인공이 연대와 우정으로 시대의 격랑을 헤쳐나간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 l 창비(2020), 1만6000원

알로하, 나의 엄마들 l 창비(2020), 1만6000원


이번에 나온 ‘슬픔의 틈새’는 일제 식민 통치가 끝을 향해 치닫던 1943년부터 2025년까지의 이야기다. 징용으로 끌려간 아버지를 찾아 엄마와 함께 사할린으로 이주한 소녀 단옥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중심으로, 20세기 후반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사할린 한인들의 삶과 역사를 그린 대하 역사소설이다.



“간혹, 신탁처럼 강렬한 존재감으로 찾아오는 이야기가 있다.”(작가의 취재 노트 첫 문장) 2018년 여름, 동료 작가들과 사할린 여행을 갔다가 문득 떠오른 어떤 소녀가 시간이 갈수록 머릿속에서 커져갔고, 그 소녀가 바로 당찬 여성 ‘단옥’이었다.



“원래는 작년에 마무리할 계획이었는데, 작년 봄에 제가 안데르센 상 글작가 최종 후보가 되면서, 인터뷰 요청이 급증하고 뜻밖에 바쁜 일들이 많이 생겨서 (탈고가) 계속 미뤄진 거예요. 어차피 해를 넘길 거라면 올해 광복절은 넘기지 말자고 마음먹었죠.”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은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IBBY)가 주관하는 상으로 ‘아동문학의 노벨상’이라고 불릴 만큼 권위를 인정받는다. 작가는 첫 두 작품 모두 청소년 소설로 쓰고 성인 판본을 함께 냈다. 이번 ‘슬픔의 틈새’는 성인 판본이 먼저 출간됐지만 청소년 판본도 곧 나온다. 표지 디자인과 도서 분류만 다를 뿐, 내용은 문장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다. “청소년 소설은 청소년들만 읽는 책이라고 생각하는 성인들이 많은 까닭에 독자의 경계를 넓히기 위해 별도의 판본을 냈다”는 게 작가와 출판사 쪽의 설명이다.



작가가 최근 10년 새 ‘일제강점기’ ‘한인 여성’ ‘디아스포라’의 삶을 그린 역사소설 연작을, 그것도 청소년 판본을 앞세워 잇달아 발표한 것은 작가 자신이 청소년 시절부터 품었던 꿈과 관련이 깊다.



“초등학교 때부터 작가가 꿈이었는데, 당시(1970년대)만 해도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책이 그렇게 많지 않았죠. 집에 아버지가 보시던 이광수 작가의 소설들이 있었는데 초등학교 때 다 읽고, 중학교 때는 박경리 선생님의 대하소설 ‘토지’를 읽어요. 1970년대 우리나라는 ‘반공’이 국시였고 북한은 생각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금단의 땅이었죠. 그런데 ‘토지’를 보면 북한을 넘어 중국과 러시아까지 광활한 무대로 이야기가 펼쳐지잖아요. 굉장히 충격적이면서도 신선했죠. 저도 나중에 작가가 되면 이렇게 무대 배경이 넓은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품고 있었어요.”



이금이 작가가 지난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카페 에무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이금이 작가가 지난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카페 에무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하지만 작가가 되고 나서도 역사소설을 쓰는 건 쉽지 않았다.



“맨 처음엔 단편 동화로 등단(1984년)했는데, 작품의 무대를 넓힐 기회가 없었고 엄두가 나지 않았죠. 무엇보다 역사 공부가 충분히 돼 있지 않았어요. 우리나라가 해외여행 자유화가 된 것도 1980년대 후반이니까 제가 감히 그런 걸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거죠. 그러다가 2004년에 처음 ‘유진과 유진’이라는 작품으로 청소년 소설을 쓰기 시작했어요. 당시만 해도 국내에 청소년 문학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됐고, 작가들에게는 당대 청소년들의 현실을 그리는 게 당면 과제였어요. 한 10년 동안 정말 부지런하게 청소년 소설을 10권 정도 썼어요. 그런데 청소년들의 현실이 주로 집, 학교, 학원을 맴돌다 보니까, 아이들에게 좀 더 넓은 시·공간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내가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이야기를 써보자, 하는.”



그 넓은 시·공간이 왜 하필이면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민초들의 디아스포라 이야기일까?



“사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가 저한테 먼저 온 건 아니에요. 분단된 한반도 남쪽을 넘어 북(한 지역)으로 올라가고 그 너머 중국, 만주, 연해주, 중앙아시아, 러시아(소련), 미국까지 우리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던 때가 역설적으로 일제강점기였어요. 시간적 배경보다는 공간적 무대가 먼저 다가온 거죠.”



이금이 작가가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카페 에무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이금이 작가가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카페 에무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세 작품은 구체적인 개인들이 살아낸 일생의 이야기가 뼈대를 이루지만, 곳곳에 역사적 사건들이 배경으로 깔린다. 강제징용과 ‘일본군 위안부’, 러-일 전쟁과 중-일 전쟁의 파장, 일제의 진주만 기습과 태평양 전쟁,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일본의 항복, 만리타향 낯선 땅에 새 삶터를 꾸린 이들의 귀환 문제, 한반도의 분단과 남북한 두개 국가 수립, 재외동포들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외면, 무국적 동포들의 핍박과 절망, 옛소련 붕괴와 냉전 해체 이후 남북한 격차 확대, 그때마다 출렁이는 한인 디아스포라 공동체, 그리고 이 모든 격랑에도 가족과 친구를 돌보며 자기의 삶을 살아내야 했던 여성들…. 이런 대하 서사를 생생한 이야기로 만들어내기 위해 작가는 한반도와 동북아의 근현대사 전반을 꼼꼼히 공부해야 했다. 거기에 상상력을 보태 등장인물들에게 살과 피를 붙이고 숨결을 불어넣었다.



“먼저 ‘일제강점기’라는 글자가 붙은 책은 다 사서 읽기 시작했어요. 그 뒤에는 논문이라든가 영상 자료들도 찾아봤죠. 작가는 자기가 쓰려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야 작품을 쓸 수 있잖아요.”



디아스포라 3부작은 제국주의 점령국들의 식민 통치에서 가장 취약했던 망국의 백성, 하층 계급, 여성, 디아스포라 난민이 주인공이다. 작품 속 그들의 삶과 선택은 놀라우리만치 당당하고 진취적이며 창의적이다. 그러나 그 파란만장한 사연들은 억지스럽지 않고, 당대 누구나 겪었을 법한 생생함과 구체성을 지닌다. 마치 할아버지·할머니 세대의 경험담을 듣는 듯하다.



“작품 속 인물들이 역사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일제강점기라고 다 독립투사나 친일파만 있는 게 아니고,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 자식은 더 나은 삶을 살게 해주는 게 더 귀하고 중했을 거잖아요. 그들도 하나같이 희로애락을 가진 인간들이고, 바로 그런 인물들에게 더 집중하고 싶었어요. 당대의 역사와 유기적으로 얽히되,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의 허구가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는 게 작품 완성도의 핵심이라고 봤죠. 글을 쓸 때 인물이든 스토리든 개연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슬픔의 틈새 l 사계절(2025), 1만8500원

슬픔의 틈새 l 사계절(2025), 1만8500원


신간 ‘슬픔의 틈새’라는 제목도 작품 속 인물들의 생의 의지와 서로의 보살핌에서 나왔다. 단옥의 엄마가 환갑도 못 살고 갑자기 사할린 낯선 땅에서 세상을 떠난 얼마 뒤, 단옥의 동생 해옥이 아기를 낳았다.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일은 이렇듯 늘 슬픔과 고통의 틈새를 비집고 모습을 드러냈다.”(313쪽)



“청소년 문학은 교육적인 측면도 있잖아요. 저는 작가로서 제 인물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거든요. 슈퍼히어로(영웅)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흔들리고 고민하고 유혹에 넘어가고 한순간 인간다움을 잃었더라도 후회하고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그런 모델들을 작품에서 많이 보여주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믿어요.”



이제 한숨 돌릴 법도 한데, 작가는 벌써 디아스포라 소설 후속작을 “두권 정도” 더 쓸 생각이다.



“이젠 해방 이후 현재까지 20세기 여성 디아스포라들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요. 1960~70년대만 해도 돈을 벌기 위해 해외로 나가야 했던 사람들이 많았고, 가족의 생계와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나 공장에 취직했던 소녀들이 있잖아요. 중국이나 옛소련 땅 해외동포들은 현지에서 평생을 살았는데 이제는 그 2·3세 세대가 거꾸로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들어오면서 또 다른 유형의 가족 이산이 생기기도 하고요.”



작가의 머릿속에선 어느새 새로운 이야기들이 새싹처럼 올라오며 가지를 치고 있었다. 두시간 가까운 이야기를 마칠 무렵, 긴 폭염을 식혀주던 한낮의 강한 빗줄기가 그치고 카페 뒤 텃밭에서 흙냄새가 피어올랐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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