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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동하는 어린 문장들 속, 어른거리는 제국의 그림자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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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939년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제1·2회 글짓기 경연대회 우수작을 수록한 ‘총독상 모범 문집’ 속 일러스트. 일제강점기 시대, 일본·조선인 어린이의 일상을 그렸다. 국립중앙도서관

1938∼1939년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제1·2회 글짓기 경연대회 우수작을 수록한 ‘총독상 모범 문집’ 속 일러스트. 일제강점기 시대, 일본·조선인 어린이의 일상을 그렸다. 국립중앙도서관 


“풀숲에 숨어서 피스톨에 총알을 넣고 빵! 하고 쏘았습니다. (…) 피스톨을 쏘면서 돌격해 가던 도중, 저는 무서워져서 도망쳐 돌아왔습니다.” (1학년 민성국)



“전쟁놀이가 시작되면 굉장해집니다. (…) 지난번에 군대놀이를 했을 때는 뒷산 난징성을 점령했습니다. 모두 모여 만세를 불렀습니다. (…) 내일도 모레도 이렇게 용감하게 전쟁놀이를 할 생각입니다.”(1학년 히라노 가즈오)



같은 나이 남자아이가 ‘전쟁놀이’를 소재로 글을 썼다. 장난감 총을 쏘고, 잠복하고, 작전을 세우고…. 아이들의 흥분에 찬 고함이 순수한 문장에 실려 귓가에 재생되는 듯하다. 하지만 두 글의 마무리는 자못 다르다. 조선인 민성국 군은 정체 모를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치듯 귀가하지만, 히라노 가즈오 군은 만세를 부르고 벅차올라 집으로 간다. 똑같이 제국의 동산에서 뛰놀았지만, 동심의 색채는 달랐다.



‘제국의 어린이들’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글짓기 경연대회 수상·출품작 일부와 그에 대한 해설을 엮은 책이다. 고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 가 일제강점기 영화, 연극, 여배우론 및 한일 관계사를 전공한 이영은이 썼다.



중일 전쟁 1년 뒤인 1938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 식민기구는 ‘내선일체’(내지의 일본과 외지의 조선은 하나다)라는 국시 아래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조선인 소학생 전체를 상대로 글짓기 경연대회를 열었다. 15살 미만의 일본인, 조선인 어린이들은 일본어로 자연, 일상, 놀이, 가족 등에 관한 수필을 써냈다. 심사위원은 조선총독부 학무과장, 경성제국대 법문학부장, 경성일보사 편집국장 등 일본인 지배층 지식인들. 심사 목표는 “어린이다운 표현”이었다.



총 7회가 치러졌는데, 이 가운데 1938∼1939 우수작만 ‘총독상 모범 문집’이라는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그간 이 기록물의 존재와 그 의의는 학계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지은이가 이 책을 발굴하고, 소재별(비전쟁/전쟁)로 분류, 대조(일본인과 조선인)해 그 의미를 길어 올렸다.



여느 글짓기 대회가 그렇듯, 참가자들은 심사를 의식하고 글을 쓴다. 하지만 심사를 위해서만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문장 두 문장 적다 보면 몰입했을 것이고, 어린이의 맑은 마음이 글에 스며 나왔을 것이다. 지은이는 경연대회 출품작이라는 작품의 위치와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단정한 문장에 스민 순정한 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유난히 추웠던 조선 반도에 바람이 쌩쌩 불지 않고 퓨퓨(ピュピュ) 불던 시대, 기관총을 빵야빵야 쏘지 않고 파치파치(パチパチ) 쏘던 시대 (…) 아이들의 이야기가 여기 담겨 있다.”




“금붕어와 송사리 같은 일본인과 조선인의 경계”가 가장 도드라진 부분은 ‘놀이’를 소재로 한 글들이다. ‘내지’에 있던 축음기를 조선으로 옮겨온 이야기, ‘내지’에 사는 할머니가 사준 프랑스식 인형 이야기 등을 쓴 일본 어린이의 글과 달리, 조선 어린이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최고의 장난감이 되고, 그 눈에 둘러싸인 마을이 최고의 유원지가 되는” 이야기를 써냈다. 1940년대 조선에 사는 일본인 이주민은 약 70만명 규모(당시 조선의 인구는 2300만명이었다) 주로 중상류층이었고 유복했지만, 조선인은 궁핍했기에 대부분의 어린이는 가계 활동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가난은 놀이를 메마르게 했다. 1학년 시마이 노리코양이 쓴 ‘아세틸렌 자동차’에서 이런 차이가 배어 나온다. “지난 일요일, 우리는 아세틸렌 자동차에 타게 되었습니다. (…) 어머니와 오모니(나이 든 조선인 가정부를 이르는 말)가 ‘다녀오세요.’ 하고 길까지 나와주었습니다. (…) 거기에서 놀고 있던 조선 아이들이 몰려와서 모두 말없이 열심히 (차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덜 능숙한 일본어로 써야 했던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어린이들의 작품이 일본인 어린이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착하고 어른스러워 보이”는 이유를 지은이는 놓치지 않는다. 책에는 조선인 거지 가족에게 잡지 사려고 모아둔 돈을 건넨 6학년 김희운군, “어린 거지”를 만나고 “나라는 사람은 백배 천배 행복한 거구나” 생각한 4학년 소병문군의 글이 실렸다. 조선인 거지를 보며 느낀 연민이 불안함과 심란함으로 이어질 법도 한데, 조선 어린이의 글들은 모두 열정을 불태우며 끝맺는다. “‘문집’ 속의 착하고 모범적인 얼굴은 (…) 식민지 조선인 어린이들에게 더 두텁게 씌워져 있었다.”



지은이는 여기에 더해 일본인과 조선인이 사용하는 ‘수신’(일종의 윤리과목) 교과서가 서로 달랐으며, 조선인의 교과서에는 “사람은 쓸데없이 위를 올려다보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교훈이 다수 포함돼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전쟁에 복무했던 교육을 들춘다.



학예회 무대에 올린 연극의 제목(‘전진하라 반도’), 친구를 골리기 위한 말들(‘장제스처럼 도망갔다’) 등 제국주의가 뜬금없이,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존재를 내보인다. 그 속에서도 생동하는 문장들에 오래 마음이 머문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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