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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시각] 보이스피싱, 당신도 먹잇감이다

조선일보 이기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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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콘서트 인기 코너 ‘황해’를 재밌게 보곤 했다. 코미디언들이 조선족을 연기하며 어수룩한 한국어와 어설픈 시나리오로 보이스피싱을 시도하는 내용이었다. 이상하다고 느낀 사기 표적이 “당신 이름이 뭐냐?” 물을 때 한 출연자가 자동 반사적으로 “린 자오밍”이라고 대답하는 부분이 백미였다.


이들의 연기가 너무 출중한 탓이었을까. 그 후 10년이 넘게 머릿속에 각인된 ‘보이스피싱’의 이미지는 그런 수준이었다. 누가 들어도 어색한 억양의 한국어와 누가 속겠나 싶게 황당한 시나리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웃어넘겼을 것이다.

현실의 보이스피싱은 완전히 다르다. 조직 규모만 수십 명에 작가·배우 등 역할 분담도 철저하다. 시키지도 않은 카드가 배달됐다고 연락해 불안감을 심어주곤, 곧바로 다른 사람이 카드사를 사칭해 “확인을 위한 것이니 이 사이트에 접속해 로그인하라”고 유도한다. 이 과정에서 휴대폰에는 모든 신고 전화를 가로채는 ‘깔때기 앱’이 설치된다.

곧이어 금감원 모 과장이라는 자가 연락해 “당신 계좌가 범죄에 사용됐을 수 있지만 너무 걱정 마라”고 위로하더니, 아무개 검사가 전화해선 “중범죄에 연루됐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10년간 구속될 수 있다”고 을러댄다. ‘굿캅’과 ‘배드캅’이 약 주고 병 주고 회유와 협박을 번갈아 해대는 통에 정신 차리기 어렵다.

놈들은 이제 딥페이크·딥보이스 등 인공지능 기술까지 쓰고 있다. 피해자들은 “어느새 주위로부터 돈을 빌려가며 거액을 송금하고 있더라”라고 입을 모은다. 대기업 법무팀 직원도, 의사나 교수 등 고소득 전문직도, 디지털에 익숙한 2030도 누구나 예외가 아니다.

지난 한 달간 보이스피싱의 위협을 알리는 기사를 써 왔다. 다양한 수법을 소개했고 보이스피싱 대응법도 안내했다. 하지만 점점 고도화되는 보이스피싱 위협으로부터 나와 내 가족들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지 묻는다면 솔직히 자신이 없다. 차라리 우리 가족은 평범한 서민층이니 범죄 조직의 주된 표적은 아닐 것이라고 기도하는 게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올해 보이스피싱 피해 액수가 1조원을 돌파할 전망이다. 정부와 경찰은 보이스피싱 대책을 내놓느라 분주하다. 경찰은 전담 수사 인력을 늘리겠다고, 금융위원회는 보이스피싱 대응 전담 플랫폼을 만들겠다고 한다. 다들 필요한 대책이고 효과가 있을 것이다. 다만 거기에 더해 한 가지 제안하고 싶다.

보이스피싱 피해를 당한 이들이 사회에서 부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한다. 누구든 보이스피싱에서 자유롭지 못한 시대다. 전세 사기를 당한 게 피해자 잘못이 아닌 것처럼 보이스피싱도 마찬가지다. 피해자들이 좌절감에 빠지지 않도록 마음을 어루만지고, 큰 피해를 입었어도 삶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최소한의 버팀목이 필요하다. 보이스피싱 피해액을 줄이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대책이다.

[이기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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