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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 모녀, 수영장에 가다

조선일보 곽아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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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선 에세이 '오춘실의 사계절'./낮은산

김효선 에세이 '오춘실의 사계절'./낮은산


만일 누가 제게 최근 읽은 책 중 가장 좋은 책을 묻는다면

온라인 서점 소설 담당 MD로 일하는 김효선의 에세이

‘오춘실의 사계절’을 꼽겠습니다.

'오춘실의 사계절'을 쓴 김효선씨./ⓒ곽은진

'오춘실의 사계절'을 쓴 김효선씨./ⓒ곽은진


저자는 청소 일을 하다가 허리를 크게 다쳐 조기 퇴직한

60대 엄마와 함께 수영장을 다닌 4년간의 이야기를

곡진하게 적어 내려갑니다.


물에는 치유의 힘이 있죠.

늘 계단이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던 엄마는

물 속에서 자유롭게 저자와 함께 손을 잡고 콩콩 뛰고,


고된 직장생활을 술로 달래던 저자도

물과 엄마의 힘으로 마음을 보살핍니다.

열 네 살때부터 염전에 나가 일하느라


한 번도 교복을 입어보지 못한 엄마,

친구들 엄마와 너무나 다른 엄마는

‘춘실’이라는 어딘지 모르게 촌스러운 이름과 함께

저자에게 감추고픈 존재였지만,

수영장에서 만난 이들이 밖에선 누구이건 간에

물 속에서 수영복만 입고

인간 대 인간으로 자신을 있는대로 내어보이는 것이

자연스럽듯,

저자는 점차 엄마를 이해하고

엄마의 청소일과 나의 책 파는 일에

똑같이 빛나는 보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감기에 걸려 며칠 호되게 앓았습니다.

열에 들뜬 채 김혜순 시인의 ‘감기’를 읽었습니다.

국제무대에서 각종 문학상을 휩쓸며 주목받고 있는 시인은

시집 ‘당신의 첫’(문학과지성사)에 실린 시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당신이 들여다보는 흑백 사진 속에 내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다른 세상에서 마주 보았다

당신의 사진 속은 늘 추웠다

기침나무들이 강을 따라 콜록거리며 서 있었다

눈을 뜨면 언제나 설산 오르는 길이었다

간신히 모퉁이를 돌아서도 희디흰 눈밭

날카로운 절벽 아래로 툭 떨어지는 가없는 벼랑이었다



‘다른 세상’이라는 단어에 밑줄을 그어 봅니다.

감기로 몸져 누울 때면 현실이 아니라

병(病)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합니다.

이세계(異世界)에 있는 것 같은 감각은

겨울보다 여름에 더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30도를 웃도는 더위, 오한으로 떨리는 몸,

뜨거운 이마와 숨결, 콧속으로 스며드는 에어컨 바람의 냉기,

열에 들떠 어지러운 정신….

김혜순 시집 '당신의 첫'./문학과지성사

김혜순 시집 '당신의 첫'./문학과지성사


여름 감기 특유의 불협화음으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계속해서 시를 읽었습니다.

“얼어붙은 하늘처럼 크게 뜬 당신의 눈을 내다보는 저녁

동네에 열병이 옮기는 귀신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지고

굴뚝마다 연기들이 우왕좌왕 몸을 떨었다

당신은 내 몸에 없는 거야 내가 다 내쫓았거든

내 가슴에 눈사태가 나서 한 시간 이상 떨었다



시의 화자가 내쫓고픈 건 바이러스인가요, 아니면 내 마음 무너뜨린 당신인가요?

시 속 화자가 앓고 있는 건 감기인가요, 당신인가요?

혼돈 속에서 시인은 끝맺습니다.

“기침나무들이 몸을 부르르 떨며 눈 뭉치를 떨구자

벌어진 계곡에서 날 선 얼음들이 튕겨져 나왔다

맨얼굴로 바람을 맞으며, 입술을 떨며

나는 얼어붙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당신이 들여다보는 여기에서 나가고 싶었다



여름감기가 유행입니다. 모쪼록 건강 잘 챙기시길요.

곽아람 Books 팀장

'읽는 직업' 가진 여자의 밥벌이로 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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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아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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