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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신비’ 읽고 페미니즘 편식주의자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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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던 1983년 여름 찍은 사진. 뒷줄 왼쪽부터 필자의 영어 교사, 가끔 아이를 돌봐줬던 이웃의 프랑스 유학생, 필자의 남편. 앞줄은 딸과 필자. 필자 제공

미국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던 1983년 여름 찍은 사진. 뒷줄 왼쪽부터 필자의 영어 교사, 가끔 아이를 돌봐줬던 이웃의 프랑스 유학생, 필자의 남편. 앞줄은 딸과 필자. 필자 제공


1980년 7월17일부터, 처음에는 거기가 어딘지도 몰랐지만,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닷새를 지내고 이어서 용산경찰서 유치장으로 옮겨져 또 5일을 지냈다. 열흘 만인 7월27일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되고 보니 정말 기막히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내가 죄수가 되어 교도소에 갇히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명수배된 기자 선배를 숨겨주는 일이 역사에 참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고문이나 교도소 수감 같은 후과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용산경찰서 유치장에서는 독방에 있었지만 서대문 구치소에서는 다른 범죄자들과 같이 수용되었다. 그래서 기왕 들어온 거 세상 구경이나 제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나는 같은 방에 있던 다른 수인들과 잘 지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처음 감방에 들어가자 그 방에 있던 여자 수인들이 “너 얼굴 반반한 거 보니 통으로 들어왔구나”라고 말했다. “통이 뭐냐?”고 물었더니, 그들이 웃으며 ‘간통’이라고 했다. 아니라고 했더니 “그럼 왜 들어왔느냐”고 묻기에, “지명수배된 선배를 숨겨줬다가 들어왔다”고 했다. 그러자 “너는 그 선배를 좋아한 거”라며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미친 짓을 왜 하느냐?”고 다 같이 나를 놀려댔다.



딸이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잡혀가 감감무소식이 되자 밤마다 잠도 못 자고 동네를 서성거리며 헤맸다는 엄마는 열흘 만에 면회가 허락된 서대문 구치소에서 죄수복을 입고 등장한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셨다. 내 죄수복에는 화재신고 번호여서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119라는 수인번호가 붙어 있었다. “네가 무슨 죄를 졌기에 이렇게 가둬 두느냐?”고 우는 엄마한테, “엄마 나 여기서 사람 구경하는 거 재미있어. 곧 나갈 테니까 걱정 말고 울지 마세요” 했다. 그건 정말 진심이었다.



그러나 엄마를 만나도 울지 않았던 내가 눈물을 터뜨린 일이 있었다. 나와 공범으로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친구 노현재의 아버님이 딸이 갇혀 있는 동안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면회 나가서 들은 것이다. 친구는 내 부탁으로 한국기자협회장 김태홍 선배가 은신할 수 있도록 화실을 내주었다가 함께 곤욕을 치렀다. 친구 소식을 듣고 와서 혼자 흐느끼자 우리 방에서 대장 역할을 하던 여자가 불같이 화를 내며 울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누구 하나가 울면 거기서는 다 같이 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사연 없는 사람이 없었고, 그 때문에 누구라도 눈물 흘리는 것을 질색하며 싫어했다.



비가 많이 내린 어느 날, 소등하고 누워 다 자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아, 소주나 한잔 먹었으면 좋겠다”면서 벌떡 일어나더니 깜깜한 방에서 자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청산가리를 탄 막걸리로 남편을 죽인 미용사 출신의 살인범이었다. 남편은 그가 바람을 피운다고 의심하며 밤마다 숫돌에 칼을 갈았다고 한다. 살아생전 교도소를 드나들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던 나는 살인범, 포주, 사기범, 도둑 등의 범죄자들과 한방에서 같이 밥을 먹고 잠을 잔다는 것이 처음에는 겁이 나고 무서웠다. 그런 이들을 어떻게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겠는가? 그들은 교도소 아니면 만나볼 수 없는 여성들이었다. 교도소에 수감된 여성들의 범죄 혐의를 분석해보면 한국 사회가 어떤 여자들을 죄인으로 만드는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생활하면서 겪은 그들은 평범한 이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포고령 위반자는 서대문 구치소에서도 직계가족만 면회가 허락되었다. 그래서 대학 시절부터 남자친구였던 남편은 면회가 어려웠다. 그는 면회가 안 되는데도 거의 매일 구치소를 찾아와 책을 넣어주고 가는 것으로 자기 존재를 알렸다. 그러나 나는 그 안에서는 책을 읽을 겨를이 없었다. 사람 구경, 세상 구경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1980년 8월17일, 잡혀간 지 한달 만에 검사의 기소유예 결정으로 풀려났다. 검사는 풀려나는 나에게 “여자가 언론자유 그런데 신경 쓰지 말고 시집이나 가라”라고 말했다. 남자 기자였다면 그가 그렇게 얘기했을까? 나와 보니 직장에서는 사직서도 쓰지 않았는데 강제해직된 상태였다. 당시 내가 일했던 합동통신에서는 검열 거부와 제작 거부 운동을 주도했던 기자들 10여명이 나와 같이 해직당했다. 그 밖에도 전국 여러 언론사에서 1천명 가까운 기자들이 강제해직을 당했고 그들은 모두 언론계 취업이 금지된 삼엄한 시절이었다.



그렇게 느닷없이 직장에서 쫓겨나고 보니 정말 앞길이 막막했다. 매일 같이 해직된 선배, 동료들과 만나 술 마시며 울분을 터뜨리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나는 당시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아이들도 있는 다른 해직 기자들은 가장으로서 생계 해결이 급선무인 경우가 많았다. 모두 언론에 뜻을 두고 기자로서 사명감을 갖고 일해왔지만 더 이상 기자로 일할 수 없게 되자 직종을 아예 바꾸는 사람들도 생겼다.



1980년 해직 시절을 돌아보면서 페미니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갑자기 시간이 남아도는 백수 신세가 되자, 그 시절 붐을 이룬 사회과학 서적을 많이 읽었다. 그때 페미니즘을 발견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페미니즘을 몰랐고 여성학이란 게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창비에서 나온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이라는 책을 보고 페미니즘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이다. 그 책은 단번에 나를 열혈 페미니스트로 만들어 버렸다.



1985년 6월 여성단체 ‘여성평우회’ 창립 2돌을 맞아 기념 강연을 하는 이효재 이화여대 교수. 연합뉴스

1985년 6월 여성단체 ‘여성평우회’ 창립 2돌을 맞아 기념 강연을 하는 이효재 이화여대 교수. 연합뉴스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은 한국 여성학의 시조와도 같은 이효재(1924~2020) 선생님이 페미니즘의 고전적인 글들을 모아 발간한 책으로 거기에 실린 베티 프리단의 글이 특히 나의 관심을 끌었다. 이는 미국의 여성학자 베티 프리단(1921~2006)이 장학금을 받아 대학원에서 공부를 더 하게 되었는데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상에 맞추기 위해 알지 못할 두려움으로 이를 포기하는 과정을 고백한 내용으로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내용이었다. 1963년 처음 출간된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Feminine Mystique)는 종종 20세기 미국 페미니즘의 두번째 물결을 추동한 책으로 평가받는다. 뉴욕타임스는 베티 프리단의 부고 기사에서 “이 책은 1963년 현대 여성운동에 봉화를 올림으로써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 사회조직을 영구히 바꿔버렸다”고 썼다. 나는 프리단의 저서 ‘여성의 신비’를 접한 이후로 페미니즘 책만 골라서 읽는 편식주의자가 되었다.



미국의 페미니스트이자 작가 베티 프리단. 위키미디어 코먼스

미국의 페미니스트이자 작가 베티 프리단. 위키미디어 코먼스


여러 가지 다양한 페미니즘 책들을 읽으며 페미니스트가 되는 일이, 남존여비와 삼종지도, 남아선호 등 여성혐오적이고 차별적인 문화에 찌든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내가 할 일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역사 속 내 역할에 대한 깨달음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페미니즘에 눈을 뜨면 삼라만상이 성차별로 보인다는 말이 있다. 딱 내가 그랬다. 페미니즘의 눈을 뜨자 그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내 인생의 수수께끼가 다 풀리는 듯했다. 그동안 엄마를 괴롭히고 나를 힘들게 했던 모든 일들이 페미니즘의 햇빛 아래 적나라한 실체를 드러냈다.



하지만 당시 나의 현실은 언론에 취업이 금지된 경력단절 여기자였다.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결혼밖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검사 말대로(?) 결혼하고 1982년 미국 뉴욕으로 갔다. 마침 남편이 뉴욕 컬럼비아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되어 동행한 것이었다.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나는 임신 중이었다. 그래서 미국 생활의 첫 2년 동안은 아이를 낳고 기르느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이가 1년8개월이 될 때까지 키우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한국에 계신 엄마에게 에스오에스(SOS)를 쳤다. 그래서 한국에 아이를 떼어놓고 미국으로 돌아와 일과 공부를 병행하게 되었다.







유숙열 | 나이 서른을 넘긴 1980년대 중반부터 극렬 페미니스트로 살고 있다. 합동통신 기자로 재직 중 1980년 해직된 뒤 1982년 결혼해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1984~1990년 미주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일하며 뉴욕시립대 대학원에서 여성학 석사학위 취득. 1991~2004년 문화일보 국제부 차장, 생활건강부장, 여성전문위원. 1997년 ‘페미니스트저널 이프’(if)를 창간했다. 2003~2006년 2기 방송위원회 위원. 현 이프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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